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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빛낸 삼국지의 숨은 영웅들~!


 


안녕하세요? Little C 기자단 정혜진입니다. 오늘 제가 들고 온 주제는 바로 <중국을 빛낸 삼국지의 숨은 영웅들>입니다. 중국 삼국지의 영웅하면 어떤 인물이 떠오르나요? 삼국지의 유비, 조조, 손권? 정말 유명하고 많은 영웅들이 중국을 빛내주었지만 아직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많은 영웅들도 삼국지의 중요한 기틀이었는데요, 어떤 인물들이 있었는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읽기 전 손가락을 눌러주는 센스!> 


 


 

 







 


1. 주유 : 손권의 든든한 보필자


 




 (주유)



 주유는 후한시대 고급관리인 태위를 2명이나 배출한 명문집안 출신이었으며 노강군 서현에서 175년에 출생하였습니다. 손견(孫堅)이 동탁을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면서 거주지를 서(舒)로 옮기자 이때 주유는 집과 부지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손견의 아들 손책(孫策)과 동갑으로 형제처럼 가깝게 지내기도 했습니다. 두 사람은 당시 16세로 금방 절친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주유는 태어나면서부터 용모와 재능을 겸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역사서에는 '유, 성장함에 따라 용모가 빼어났다.'라고 적혀있기도 합니다. 용모가 단정한 것은 인망을 얻는 데에 커다란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주유는 학문에도 뛰어났다고 하는데, 그는 특히 군자의 육예(예절, 음악, 활쏘기, 말타기, 글쓰기, 수-역주)의 하나인 음악에 조예가 깊어 아무리 술에 만취되었다 해도 연주자가 음을 틀리게 연주하면 귀에 거슬려 하면서 연주자를 뒤돌아 보았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거리에서는 '음곡을 틀리지 마라. 주의 젊은 서방님의 따가운 시선을 받게 되니까'라는 노래가 유행했고 사람들로부터 '주랑(주씨 가문의 도련님)'이라고 불리며 사랑을 받았다고 합니다.


 



 


(손권)



 주유는 처음 손견을 섬기다가 손견이 죽은 후 손책을 섬기면서 양쯔강 하류 지방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손책과 함께 형주의 많은 지역을 점령하였는데 교공(橋公)의 두 딸을 포로로 생포하였는데, 이 두 딸들은 절세의 미인으로 언니 대교(大橋)는 손책의 아내가 되었고 동생 소교(小橋)는 주유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200년 손책이 사망하자 그의 동생 손권(孫權)이 등극하였고 주유는 손권을 충실하게 보필하기 시작했습니다. 208년(建安 13년) 9월, 위(魏)의 조조(曹操)가 화북을 평정하고 형주로 진격해 오자, 노숙 등과 함께 항전을 주장하며 강화론자들에 맞서기도 했습니다. 손권을 설득하여 군사 3만을 주면 조조를 격파하겠다고 장담하였고, 마침내 손권을 설득하여 오나라 대도독으로 군사를 이끌고 참전하여 적벽대전에서 화공(火攻)으로 위군을 대파했습니다. 그 뒤 지금의 쓰촨분지 일대인 익주(益州)를 점령하여 촉을 병합하고 조조의 위를 점령하여 천하를 통일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것이 주유가 구상한 천하 이분지계였습니다. 주유는 이를 실행하기 위해 장링으로 귀환하다가 36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며 삶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나관중 '삼국지')



나 관중의 '삼국지'에서의 실제 주유의 모습과 달리 왜곡된 면이 많다고 평가됩니다. 이 '삼국지'에서의 주유는 제갈량을 이기지 못해 안달 난 인물로 표현되고 있는데, 이는 나관중의 '삼국지가' 주로 연극을 토대로 하여 발달해 왔기 때문에 과장되고 왜곡된 갈등 구조가 많은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중국인들은 영웅들을 만들고 그들의 싸움을 이야기로 만들기를 즐겨하는데, 유방과 항우의 관계에서 유방이 영웅시 되고, 항우는 패자의 모습으로 표현된 것처럼 제갈량의 비범함을 돋보이기 위해 주유의 모습이 많이 왜곡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제의 주유는 조조라는 강력한 적을 맞이하여 의연한 태도와 담력, 지도력을 발휘하여 적은 병력으로 대병을 크게 이긴 사람입니다. 손권은 주유에 대해


 


 "주유는 영웅답고 장렬하고 담력과 지략이 보통 사람들을 넘기 때문에 조조를 무찔렀고, 그로써 오나라가 형주에 세력을 뻗을 수 있었던 것이오. (오서: 여몽전)"


 


 라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적벽대전에서의 결정적인 역할은 황개의 몫이지만, 전체 전쟁을 총괄하여 형주정벌에 이르기까지 한 것은 주유의 몫입니다. 이것이 결국 삼국의 정립을 가져온 것입니다. 또한 뛰어난 군사 지휘자로서의 면모뿐만 아니라 높은 지혜와 인품을 가진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소설 속에 표현된 주유의 모습에서 벗어나 실제 주유의 모습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주유 평가 출처: http://blog.daum.net/sinikev/15857424)


 


 







 


<적벽대전>


 




 (적벽대전 유적지)



 적벽대전은 중국 후한(後漢) 말기에 위나라의 조조가 오나라의 손권, 촉나라 유비의 연합군과 싸웠던 전투입니다. 원소(袁紹)를 무찌르고 화북을 평정한 조조는 형주목을 지키고 있는 유표(劉表)를 정복하고 형주땅을 차지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였습니다. 유표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손쉽게 형주를 차지한 조조는 강릉으로 달아나는 유비를 추격하였습니다. 조조군은 장강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였고 적벽에서 손권?유비 연합군과 대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조군은 손권의 장수 황개(黃蓋)가 화공(火攻) 계략을 세워 군선 불타는 대패를 당하고 화북으로 후퇴하게 되었습니다. 이 결과 손권의 강남 지배가 확정되고 유비도 형주 서부에 세력을 얻어 천하 3분의 형세가 확정된 것입니다.


 적벽대전에 대해서는 정사에서 기록한 내용이 매우 간단하기 때문에, 예전부터 약간의 의문들이제기되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싸움이 일어난 장소에 관한 점입니다. 적벽은 주유 군대가 포진했던 것이며 조조 군대는 맞은편의 오림에 있었으니까 만약 화공법이 이루어졌다면 그 장소는 오림이어야 하므로 '오림의 싸움'이라고 불러야 하는데 예로부터 '적벽의 싸움'이라고 명명해 왔다는 점이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조조는 화공법에 의해 패배한 것이 아니라 군대 내부의 전염병 유행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어서 스스로 병사들의 배와 그 밖의 설치물을 태우고 퇴각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삼국지 《강표전(江表傳)》에 의하면 이 싸움이 끝난 지 한참 후에 조조는 손권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가운데 ‘적벽에서는 주유에게 헛된 명성을 얻게 했다’고 아쉬운 듯이 말했는데, 이것이 그 증거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당시의 상황을 두고 다양한 기록들이 남아있어 적벽대전에 대한 혼란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2. 순욱 : 위나라 조조의 최고 책사


 




  (순욱)



 순욱은 영천군 영음현 출신으로 조부 순숙은 순자의 11세손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부친 순곤과 숙부 순상도 모두 명망이 높은 명문가 출신입니다. 어려서부터 황제를 보좌할 재목으로 여겨졌으며 가족과 함께 기주로 이동하여 원소에게 큰 대접을 받았으나 원소가 인물이 아님을 인지하고 조조의 휘하에 들어가 그의 책사가 되었습니다. 삼방순욱(三訪筍彧), 말 그대로, 조조가 세 번 방문해서 순욱을 얻었다는 말입니다. 삼방순욱의 고사는 정사에는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민간 전설에 널리 퍼져 있는 이야기 중의 하나입니다. 한눈에 조조가 인재를 알아보았다는 점에서 조조의 비범함이 드러난 것 같습니다. 이후 순욱은 도겸 정벌에 나선 조조를 대신하여 도성을 지키던 중 반란이 발생하였으나 도성을 잘 지켜냈으며 조조의 귀환 후 복양의 여포를 격퇴하기도 했습니다. 196년 순욱은 조조에게 당시 쫓기는 몸이 된 후한의 황제 헌제를 받아들이도록 조언하였으며 이후 조조는 한나라의 대장군으로 승진하고 순욱은 시중, 상서령으로 승진되었습니다. 이 일로 조조는 천하 쟁취의 기반을 쌓게 되었습니다.


 



(조조)



 순욱은 재능있는 사람을 알아보는 인재의 선발에도 탁월하여 조조의 신임을 받았습니다. 원소와 대치 상황에서 다른 측근들은 모두 승산이 없다고 했으나, 순욱은 서신으로 조조를 설득하고 마음을 돌리게 하여 결국은 기습으로 역공하여 원소의 군사들을 물리치게 되었습니다. 이후 순욱의 장남 순운은 조조의 딸 안양공주를 아내로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한 왕조의 지속을 원하는 순욱과 천하를 차지하려는 조조 사이에는 갈등이 생기게 되었고, 이후 순욱은 손권 정벌에 시중 광록대부로 참전하는 와중에 병을 얻어 50세로 사망했습니다. 이와 다른 설로는 참전 중인 순욱에게 조조가 보낸 위문 물품이 아무 것도 없는 상태로 전달 되었고, 이를 두고 순욱은 조조와 자신의 관계에서 신뢰는 사라졌음을 깨닫고는 독을 마시고 자결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순욱에 대한 평가>



 삼국지 인물들 중 잘 알려지지 않는 순욱이지만, 어느 블로거의 순욱에 대한 다음과 같은 평가는 순욱의 최고 참모로서의 면모를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좋은 새는 나무를 가려 깃들고, 지혜로운 신하는 주인을 가려 섬긴다. 순욱은 조조를 만나 그 뜻을 펼쳤다. 때로는 웅대한 전략구상으로, 때로는 혀를 내두르는 묘책으로, 그리고 때로는 근거지를 지키는 행정으로 난세를 평정했다. 결코 그 뜻을 충분히 살리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유방에게 전략가 장량과 행정가 소하가 있었다면, 조조에게는 그 두 사람을 합친 순욱이 있었다. 그는 흠모의 정이 느껴지는 초일류의 참모였다. 마지막으로 나관중본 삼국지에서의 순욱에 대한 평가를 올리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영상의 순욱은 자가 문약이라.
사람들은 제왕 보좌할 인재라 했더라.
이름은 다섯 크나큰 산과 가지런하고
공업은 조정의 세 부서를 울렸네.
맹덕이 끝까지 처음처럼 대하지 못해
유후가 다시 나타나지 않누나.
충성스러운 이 한을 품고 죽으니
천하사람 모두 슬퍼하누나.



(순욱 평가 출처: http://blog.naver.com/agora0214/110023013518)  


 







 


 3. 사마의(사마중달) : 위나라의 정치가이자 군략가


 




 (사마의)



 사마의는 하내군 온현 효경리(지금의 하남성) 출신으로, 경조윤(京兆尹)을 지낸 사마방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중국 삼국시대에 위 나라의 조조, 조비(조조의 아들), 조예(조조의 손자), 조방(조예의 양자) 등 4대를 보필하며 공을 세워 무양후라는 직위에 봉해졌습니다. 손자인 사마염이 서진(西晉)을 세운 뒤에는 선제(宣帝)로 추존되었고, 묘호를 고조(高祖)라 하였습니다.
 후한 안제(安帝) 때 정서장군을 지낸 사마균의 후손으로 대대로 고관을 배출한 명문가 출신에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유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유학의 가르침을 늘 깊이 간직하고 따랐다"고 전해집니다. 형인 사마랑을 포함해 가문의 8형제가 모두 총명해 이른바 '사마팔달(司馬八達)'이라고 불렸으며, 그 가운데에서도 사마의는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조조가 이를 듣고 등용하려 했지만 병이 들었음을 내세워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208년(建安 13년) 승상이 된 조조는 사마의를 압박해 문학연(文??)으로 삼았고, 그 뒤 그는 황문시랑(黃門侍郞) 등의 벼슬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조조가 위왕(魏王)으로 봉해진 뒤에는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가 되어 조비를 보좌했다. 당시 사마의의 건의로 둔전제(屯田制)가 실시되었는데, 이는 위(魏)의 국방을 강화하고, 농업생산력을 안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게 되었습니다.
 조조는 사마의가 마음 속에 큰 뜻을 품고 있음을 알아채고 그리 신임하지 않았습니다. 조조는 사마의가 낭고상(狼顧相)이란 소문을 듣고 사마의를 오게 하여 고개를 돌려보게 했는데, 몸을 움직이지 않고도 얼굴이 똑바로 뒤를 향했습니다. 또 조조는 세 마리의 말이 한 구유(槽:조씨의 曹와 음이 같다)에서 먹이를 먹는 꿈을 꾸어 이를 매우 언짢게 여겼다고 전해지는데, 이 세 말은 훗날 위나라를 멸망의 길로 들게 하는 사마의, 사마사(司馬師), 사마소(司馬昭)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조조는 아들 조비에게 "사마의는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될 사람이 아니다."라며 항상 경계할 것을 충고했습니다. 조비는 사마의와 평시 도움을 주고 받았었는데 조조의 말을 듣고 이 때문에 그를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사마의는 조조의 의심을 거두기 위해 하급 관리의 직무를 밤을 새며 보고 가축을 기르는 하찮은 일까지도 기꺼이 함으로써 조조를 안심시키기도 했습니다.
 조조가 한중의 장로(張魯)를 굴복시켰을 때 사마의는 유엽과 함께 유비가 점령한 지 얼마 안 된 익주를 칠 것을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익주의 민심을 달래고 군을 정비한 유비가 한중을 점령하여 조조에게 큰 우환을 안겨다 주게 되었습니다. 우금과 방덕 등이 관우에게 대패하고 관우의 기세가 중원에까지 뻗치자, 조조는 하북으로의 천도를 검토했습니다. 이때 사마의는 장제(蔣濟)와 함께 "천도한다면 적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니 인근의 백성들이 크게 불안해 할 것입니다. 손권과 유비는 겉으론 친밀하나 안으로는 소원하니 손권을 달래 관우의 후방을 기습하면 번성의 포위는 자연히 풀릴 것입니다." 라고 건의했고 조조는 이 말을 따랐습니다. 결국 손권은 여몽으로 하여금 형주를 쳤고 결국 관우의 목을 베었습니다.
 사마의는 이후 위나라의 태자중서자가 되어 진군(陳?), 오질, 주삭과 함께 태자 조비의 신임을 받았습니다. 조비가 후한으로부터 선양받아 위나라의 황제가 되었을 때, 상서(尙書)로 임명이 되었습니다. 224년 무군대장군가절로 전임되어 급사중과 녹상서사의 벼슬이 더해졌습니다. 조비의 사마의에 대한 신뢰는 매우 두터웠는데 사마의에게 이르길, "짐이 동쪽에 있을 때는 그대가 서쪽을 맡고, 짐이 서쪽에 있을 때는 그대가 동쪽을 맡으시오."라는 말도 전해집니다. 조비가 죽을 때 사마의, 조진, 진군을 불렀고 황태자 조예에게 조서를 내려 말하길, "이 세 명의 신하와 틈이 생기더라도 결코 의심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도 합니다.
 조조의 손자이자 조비의 아들인 조예가 황제가 된 후 사마의는 무양후로 이봉되었고, 표기장군이 되었으며, 태화 원년(조예 즉위, 227년)에는 독형예이주제군사를 겸했습니다.
태화 4년(조예 즉위 4년, 230년), 사마의는 대장군에 임명되고 대도독, 가황월의 벼슬이 더해지게 됩니다. 그 해에 조진과 더불어 촉한을 공격했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퇴각을 하게 됩니다. 231년 제갈량이 천수를 공격했을 때 사마의는 조예의 명을 받아 장안(長安)에 주둔해 도독옹량이주제군사를 맡았습니다. 이후 역사상 유명한 제갈량과의 대결을 벌이게 됩니다.
 제갈량의 북벌은 227년부터 장장 7년 동안 6차례에 걸쳐 행해지는데, 1차 북벌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마의가 나섰고 총지휘한 것은 2번이라고 합니다. 첫 대결은 231년으로, 조진이 죽은 뒤 촉군의 약점이 식량 보급에 있음을 간파한 사마의가 지구책을 쓰고 그 전략이 효과를 발휘해 촉한군은 퇴각을 하게 되지만, 장합(張?)의 진언을 무시하고 추격했다가 장합을 잃게 됩니다.
 두 번째 대결은 234년, 제갈량은 장기전을 예상해 3년에 걸쳐 준비하는데, 오장원으로 출진한 제갈량에 대해 사마의는 또다시 지구전을 펼칩니다. 제갈량은 부인용 머리 장식과 여러 장신구들을 사마의에게 보내며 비웃었지만 사마의는 도발임을 눈치채고 편승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지고 온 사자에게 제갈량의 안부를 물었다고 합니다. 이때 사마의는 수시로 촉한군의 진영을 염탐해 제갈량이 죽음에 임박해 있음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의 죽음을 안 사마의가 즉시 전군에 공격 명령을 내렸으나 제갈량의 목상을 보고 아직 살아있는 줄 착각하고 놀라 도망쳤다고 전해집니다. 촉한군이 퇴각한 뒤 진영을 살펴본 사마의는 제갈량을 '천하의 귀재'라고 평가했다고 합니다.


 




 (사마염:사마의의 손자)



 후일 사마의는 아들들과 함께 위나라의 실권자인 조상 형제(조비의 신하였던 조진의 아들)에 대항하여 고평릉의 변을 일으켜 성공하게 됩니다. 이로써 사마씨 일가는 위나라의 조씨 정권을 탈취하여 허수아비로 만들고 그 손자 사마염이 선양을 받아 국호를 진으로 고칩니다. 그 이후 사마의는 오래 전부터 앓아온 지병을 앓다가 결국 사망하고 말고, 진 제국 성립 후 사마염은 사마의에게 선황제의 시호를 올렸습니다.


 


  







 <사마의에 대한 평가>



 중국인들의 사마의에 대한 평가는 유쾌하지 못하다고 합니다. 사마의의 손자였던 사마염은 진나라를 건국한 후, 진나라 건국 전 조조의 위나라가 지나친 인재 숭상으로 종실(황제의 친족)을 등한시 하여 결국 신하들에 의해 나라가 망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사마염은 자신의 가족이나 친지들을 왕으로 봉하면서 그들에게 군사를 주고 자신들의 세계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이 후 사마염의 이러한 정책 때문에 형제들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된 '팔왕(八王)의 난' 이 발생하고 이후 중국 역사 속의 대혼란기인 5호 16국 시대를 가져왔습니다. 때문에 중국인들은 사마의의 후손들의 잘못된 정치 때문에 사마의에 대한 업적까지 높이 평가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한나라 이후 약 3백~5백년 동안 중원을 통치한 유일한 왕조였기 때문에 포기하기도 어려운 나라로 보기도 하여 사마의와 진나라에 대한 애증(愛憎)이 교차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사마의 평가 출처: http://blog.daum.net/sinikev/15857420)



(혹시 ‘삼국지’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시거나 궁금하시다면 링크를 클릭해 보세요!)
http://blog.naver.com/chinasisa/20126191276



여기까지 삼국지의 숨은 영웅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삼국지 속에서 한 번 쯤은 만나봤던 인물들이었습니다.^^ 위에서 소개한 세 영웅들 외에도 삼국지를 만든 많은 영웅들도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더 만나보도록 해야겠습니다! 그럼 저는 다음 기사로 다시 찾아 뵙도록 하겠습니다. 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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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중국 영웅,삼국지,유비, 조조, 손권,주유,적벽대전,순욱,사마의,제갈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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