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유명하다고 하는데 나에겐 생소한 ‘십이국기’. 사전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이 책의 서평단용 가제본 도서를 읽게 되었다. 정식 출간본의 60% 정도의 완성도에서 서둘러 평가받고 싶었다는 출판사측의 의도는 이 책에 대한 자신감이었다. 과연 어떤 책이기에 이런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까하는 호기심과 더불어 판타지 소설에 대해 별 흥미를 갖지 못했던 내가 끝까지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까하는 우려감으로 이 책을 펼쳤다.

결론은 ‘삼국지’만큼이나 재미있었다. (그리고 예판 바로 구매^^) 전체 내용으로 보면 시작부분에 불과한 1권이기에 과연 어떻게 독자를 사로잡을 것인지 궁금했는데 책을 덮고 나서는 이 1권만으로도 충분히 한권의 소설 역할을 다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쿄에 사는 평범한 여고생인 요코가 환상의 세계인 십이국기에 도착해서 경국의 왕이 되는 과정을 그린 것이 1권의 내용이다. 십이국기의 배경이 되는 곳은 옛날 왕조시대의 중국을 연상시킨다. 옷차림새나 사람들이 사는 장소가 그렇다. 현실의 세계에서 달의 그림자를 뚫고 찾아간 그곳은 지구처럼 둥근 땅이 아니라 편평한 곳이다. 거기에 있는 12나라를 다스리는 왕들은 이미 사람이 아니라 신에 근접해있다. 요코는 원래 이곳의 사람이지만 천기의 흐름이 잘못되어 현실의 세계에서 태어난다. 각국의 왕은 상스러운 동물인 기린의 선택을 받아야만 왕이 될 수 있는데 경국의 기린인 게이키가 자신이 선택한 왕인 요코를 데려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요코는 현실세계에 있을 때 모난 구석이 없는 착한 소녀였다. 말썽이 생기지 않도록 늘 조심하고,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는 대신 주위 상황이 흩트려지지 않도록 배려하는 그런 여학생이었다. 누구나 요코를 좋아했기에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요코에 대해 주위 사람들은 안타까워하며 힘들어 할 줄 알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요코가 사라진 자리에는 차라리 잘 되었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모두에게 착하게만 보였던 요코를 주위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아이’로, ‘아부성이 강한 아이’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코는 자신이 보여줬던 행동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부정적으로 비춰진데 대해 상심하면서도 자신의 행동이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비겁하고 게으른 모습이었음을 인정한다.

편하게 살기 위해 남에게 자신을 맞춰가던 요코는 이쪽 세계에서는 혼자서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강한 모습을 보여준다. 누구도 믿을 수 없고, 아무도 편이 되어주지 않는 세계에서 결코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모습은 가슴 뭉클하다. “아무도 아까워하지 않는 목숨이기에 나라도 아까워하겠다”며 자신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하는 요코는 이제 더 이상 남의 눈치만 보며 하루하루를 편하게 보내기에 급급했던 착한 여학생은 아니었다. 우여곡절 끝에 사로잡혀있었던 경국의 기린 게이키를 구해내고 그에게서 다시 한 번 충성을 맹세 받는 요코의 모습은 벌써 의젓한 경왕의 모습 그대로였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이 한 행동에 책임지려고하는 요코는 이미 한 나라를 다스릴 지도자의 자질이 충분히 있어 보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동떨어진 환상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지만 꼭 그렇게 만은 읽혀지지 않았다. 요코의 현실이 우리들의 현실이라면 십이국기는 우리 자신들 내면의 세계가 아닐까 생각하며 읽었다. 그렇게 읽다가 보니 이 모든 이야기가 요코가 꾸고 있는 찰나의 꿈이며, 꿈에서 깨어난 요코는 앞으로 현대판 구운몽의 주인공처럼 다가올 세파에 흔들림 없이 살아가는 멋진 사람이 되어갈 것 같다.

판타지 소설은 황당무계하다고 느껴서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에 만난 십이국기는 단 한 권의 내용으로 이런 내 선입견을 깨트려 주는 역할을 충분히 했다. 우리들 모두의 마음 안에는 십이국기가 있고, 그 안을 모험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성장시키고자하는 바람이 있으면 누구나 가능하지 않을까. 앞으로 십이국기의 내용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몰라도 1권에서 보여준 재미와 몰입도가 이어진다면 삼국지에 버금가는 멋진 소설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