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함께 끝장나는 중이다. "전부 소진될 때까지,/소진되고 난 이후 소진된 것이 다시 소진될 때까지" 할 수 있는 일이란 지난날의 암호를 복기하거나 견딜 수 없는 심정으로 그저 서로를 두들겨 패며 울음을 터뜨리는 일뿐이다.
적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고 마음껏 싸워볼 수도 없이 영원히 전투태세만을 유지해야 하는, 즉 진짜 끝장은 일어나지 않지만 전시 상태도 끝나지 않는 무력한 상황에서 우는 듯 웃는 듯 이상한 표정으로 지쳐가는 것이다.
백은선의『가능세계』는 쓰기라는 행위 자체에 의미를 두는 퍼포먼스 너머 절대 똑같이 반복해 쓸 수 없는 시로써, 이러한 절망과 파국의 시대에 유일하게 가능한 시의 존재 방식을 드러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