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영화가 무서운 영화일까?

피를 빨아먹는 뱀파이어나 귀신이 나오는 영화일까?

아니면 사람을 마구 죽이는 나쁜 사람을 찾아 하나씩 밝혀가는 살 떨리는 영화일까?

후카사쿠 킨지 감독이 2000년에 만든 일본 영화 <배틀 로얄 Battle Royale>은 무섭다.

믿음이 사라지고 서로 못 잡아 먹어 안달이 나는 세상을 보여주는데,

바들바들 떨려서 무서운 게 아니라 그런 세상에 어떻게 살까 생각하면 가슴이 서늘해진다.

아이들은 어버이를 믿을 수 없고, 배우는 아이들은 가르치는 사람들을 따르지 않고,

어른들은 아이들을 그냥 두고볼 수 없는 세상...개판인 세상이다.

이런 세상이 와서는 안 되겠지만, 영화 속에서는 그런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리고 있다.

눈 뜨고 못 볼 일들이 가까운 나라 일본에서 벌어진다.

일자리를 잃은 사람이 15%가 넘고, 가야 하는데도 배움터에 가지 않는 사람이 80만명이나 되고,

배움터 안에서 벌어지는 싸움 때문에 가르치는 선생이 한 해에 1,200명이나 죽는 먼 뒷날의 얘기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무서워한다. 그래서 새로운 법을 만들었다. 이름하여 '배틀 로얄법'이란다.

한 해에 한 반을 그냥 골라서 그 가운데 한 사람만 살아남게 하겠다는 것.

서바이블 게임처럼 하는데, 이건 놀이가 아니라는 게 다르다. 살고자 하면 다른 이들을 죽여야 한다.

즐겁게 수학여행을 가던 중학교 3학년 비반 42명은 난데없이 아무도 살지 않는 섬으로 잡혀간다.

군인들을 거느리고 이들한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주는 사람은

뜻밖에 1학년 때 배웠던 기타노(기타노 다케시)선생으로, 가르치는 수업이 따분하다고

저한테 칼을 휘둘렀던 학생 때문에 학교를 떠난 사람이다.

이젠 아이들의 목숨을 쥐고 흔드는 사람이 되어 나타났다.

사흘 안에 싸워서 살아남은 한 사람만 섬을 떠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살아가는 데 있어야 할 먹을거리와 마실 것, 다른 사람을 죽이는 데 쓸 것 따위가 들어있는

보따리를 하나씩 받아 섬 곳곳에서 어떻게든 죽지 않고 살아야 하는 이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은 어떻게 삶을 갈무리 하려 할까?

어른들보다 마음이 여린 아이들은 사이좋게 잘 마무리를 할까?

영화 속의 아이들이나 어른들은 마무리가 쉽지 않다. 살아온 속내가 다르기 때문이다.

일을 풀어가는 건 아이나 어른이나 다 같다.

게다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총이나, 수류탄, 도끼, 석궁, 낫 따위를 가졌으니 제 마음대로 움직인다.

혼자만 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과 힘들고 어렵지만 같이 살길을 찾는 이로 나뉜다.

나나하라 슈야(후지와라 타츠야)나 나카가와 노리코(마에다 아키)같은 이들은

동무들을 죽이지 않고 살아갈 길을 찾으려 하지만,

미츠코나 전학온 아이는 제 살길만 찾아 닥치는대로 죽이고 본다.

짝사랑하던 아이한테 "죽기 전에 살이나 한 번 섞어보자"며 추근거리는 사내 아이도 있고,

같이 있는 동무가 죽일까봐 두려워서 잠을 안 자기도 하고, 학교에서 왕따를 시켰다고 덤비기도 하고,

어릴 때 나쁜 아저씨 때문에 살짝 맛이 간 계집 아이는

"아무도 나를 지켜주지 않으니 빼앗으며 살고 싶었다"며 마음에 안 드는 아이들을 죽이려 하고...

동무를 죽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혼자 살아남을 힘도 없어 그냥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도 나타난다.

그러니 3년 전에 끼어들었다가 다시 잡혀 온 카와도(야마모토 카로)는 차갑게 말한다.

"다들 미쳤어...이제 아무도 믿지마"

슬픈 일이다. 이런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건...

아무리 아이들과 어른이 말이 통하지 않고 마음을 나눌 수가 없다고 해도 이건 아니지...

울타리에 갇힌 삶을 살아가는 아이들이 힘든 것은 알겠지만,

제 삶도 제대로 꾸려가기 어려워 아이들을 챙길 힘도 없는 어른들의 삶도 안타깝지만,

우리의 앞날이 장밋빛이 아니라 어둡다고 하더라도 이런 일까지 해야 할까?

어른은 아이들한테 외친다. "삶은 게임이야..."

"이 나라는 저런 놈들 때문에 맛이 갔어. 그래서 높은 분들이 이런 배틀 로얄법을 만든 거야..."

아이들도 지지 않고 대든다.

"어른은 안 믿어. 힘들다고 아이를 두고 마음대로 저승으로 가버리고..."

아이들이 죽든 살든 날마다 죽은 아이들의 이름을 마이크로 불러주는 기타노 선생마저 세상을 버린다.

"학교에선 아이들이 싫어하고, 집에서는 딸이 싫어해...난 돌아갈 데가 없어"

끔찍한 세상이다.

아이는 어른들을 믿지 않고, 어른들은 아이들을 벌레보듯 한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모르지만,

이런 몹쓸 일은 아이들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모두 어른 잘못이다.

어린 아이들을 내세워 싸움을 하게 하여 피를 보는 감독의 생각은 따라가지 못하겠지만,

뒷날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누가 잘라 말할 수가 있으랴.

줄거리가 잘 짜여 있고 섬 안에 있을 때와 그에 앞서 살아온 때를 엮어서

이야기를 매끄럽게 풀어가는 솜씨에 별 다섯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목이 잘리고, 피가 뿜어져 나오며, 서로 죽이겠다고 총질을 마구 해대는 아이들의 싸움이 보기에

안쓰럽고, 어린 티가 나지 않는 중학생을 내세운 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별 점을 깎았다.

디브이디는 깔끔하다. 화면이나 소리는 좋다. 보너스도 푸짐하다.

타카미 코슌의 소설을 바탕으로 영화로 만들 때의 온갖 이야기들이 담겨져있어 좋다.

이런 영화를 좋아하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얼굴도 보여준다.

그런데 디브이디는 한 번 들어가더니 나오지 않는다. 사기가 어렵다.

아무리 해도 '바토루 로와이아루'로밖에 말하지 못하는 일본말을 들으면,

깔끔하게 '배틀 로얄'이라 말할 수 있는 우리말이 마냥 좋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