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므 파탈(Femme Fatale)이라는 말은 흔히 '거부할 수 없는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요부(또는 악녀(惡女))'란 의미로 많이 쓰인다. 그런데, 이런 해석을 가만히 음미해 보면, 여기에는 부정할 수 없는 성(性,Gender)적 일방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치명적인 매력은 나쁜 것(요부 또는 악녀라는 개념이 그 나쁨을 강하게 뒷바침한다)이고 그래서 결국 불행이나 파멸을 암시한다는 뉘앙스 자체도 지극히 남성적인 사고방식과 관점에 기인한 것이니까. 우리는 알게 또는 모르게 그런 다소 편향된 사회적 관념 속에 길들여져 있는지도 모른다. 대중매체의 많은 '팜므 파탈' 들이 남성적인 시선에 의해 형상화된 구성물인 것처럼.

그런데, 정이현의 단편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 속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대개의 여성들이 (비록 그것이 여성 작가에 의해 쓰여진 작품이라해도)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강요된 가면을 쓴 (As-Is라기 보다는 To-Be적인) 여성성을 구체적인 형상으로 구현해내는 것과는 달리, 그녀의 작품 속 여성들은 하나같이 '욕망의 객체적 대상'이 아닌 '욕망의 주체'로서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 속에서 이기적이며 개인적인 선택을 하는 소위 '못된 여성(Fatal Woman)'들이다. 이 단편집을 읽어가면서 느낄 수 있는 불편함의 연원은 그런 설정에 대한 이질적 생경함이나, 그런 뒤집어보기를 통해 드러나는 불편한 진실의 노출에 대한 본능적 거부감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그것이 어쩌면 더 세상의 반쪽을 정확하게 규정하는 정의일 수 있다는데서 오는 불편함이랄까. 그러나 그게 실존이다.

실존주의는 19세기 낭만주의 정신의 20세기적 계승이라 한다. 낭만주의가 절대성을 가지던 사회체제와 종교시스템 의 권위가 약화되는 경향 하에서 비합리적 감각과 감성에 대한 새로운 '가치 재평가'의 과정이라면, 그래서 그렇게 재평가된 인간의 '일반적 본성'의 낭만주의적 '자기실현(Selbstverwirklichung)'이 당시 삶의 새로운 목표가 되었다면, 바로 자기실현의 목표를 구현해햐할 대상이 되는 개별적 자아의 다름을 자각하는데서 나온 것이 실존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정이현의 단편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 속 여주인공 들은 하나같이 '실존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그녀들을 좀 더 정확하게 규정하는 단편집의 제목은 <실존적 사랑과 낭만적 사회>가 더 어울릴런지도 모른다^^)

초기 작품집이어서인지 같은 작가의 단편집 <오늘의 거짓말>보다 약간 더 직설적이고 도발적라는 느낌이다. 이 작품을 읽으며.. 어쩌면 지나치게 넘겨읽은 탓일 수도 있겠지만, '실재'와 '당위'의 차이에 대해 우리는 무의식적 이중잣대를 드리우고 살고 있는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실재와 그들의 당위, 내가 보여주는 당위, 그들에게서 보이는 실재라는 식이랄까. 그러면서도 그것이 또한 정상적 삶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이 설명하기 힘든 미묘한 모순 앞에서 난 또 침묵을 선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