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학자 브루너는 "표현방식을 학생 수준에 맞추기만 하면 어떤 어려운 개념도 이해시킬 수 있다"고 언급했다. 학생의 발달 수준을 파악하고 이에 맞게 자료의 형태를 변형하면, 학자들이 다루는 어려운 개념일지라도 어린 아이에게도 이해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학생들은 어려운 개념이 등장하면 지레 겁을 먹고 공부를 포기하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브루너에 따르면 학생이 친숙한 형태의 자료로 표현하면 학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브루너의 말이 항상 옳다고 볼 수는 없지만, 교육자료의 표현방식의 중요성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유용하다.

"세계화"라는 개념은 어느 새 우리 삶 속에 깊숙히 들어와 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우리는 안방에서 세계 여러 지역의 이슈를 클릭 한번으로 볼 수 있고, 어느 정도 여유만 있으면 세계 어느 지역이라도 여행이 가능하다. 게다가 일상 속에서 먹고 사용하는 것들이 세계 여러 지역에서 생산단계를 거쳐서 내게 오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나의 소비활동이 다른 나라 사람의 삶에 영향을 줄 수도 있는 세상이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세계화와 별개로 살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고, 세계화는 근대화된 우리나라 혹은 제1세계 사회를 설명하는 핵심적인 개념으로 알아야 한다. 하지만 이 세계화라는 개념은 한편으로 추상적이고 광범위하며 모호하기까지 하다. 세계화된 세상 속에서 일상적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들마저도 세계화를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게다가 교과서나 언론 등에서 표상되는 세계화의 이미지는 세계 여러 지역간의 화합, 상생 등 긍정적인 이미지만 강조되기도 한다. 세계화 시대의 주역이 될 학생들은 세계화 개념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필수적이지만, 어려운 세계화를 잘 모르거나 혹은 관심이 없기도 하다.

세계화는 과연 전 세계 친구들이 웃는 표정으로 친하게 지내는 모습으로 나타날까?

이 책의 저자인 독일의 저술가 볼프강 포른은, 세계화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정작 일상 속 세계화를 인지하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세계화의 구체적 표상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책을 썼다. 세계화라는 어려운 개념을 학생들의 수준에 맞도록 쉬운 형태로 보여주고 있다. 우선 '빨간 양털 조끼'라는 일상적이면서도 세계화를 설명하기에 적절한 소재를 정하였다. 그리고 가상의 단편소설 형태로 글을 구성하고 삽화를 넣어, 학생들이 접근하기 쉽게 엮었다. 빨간 양털 조끼의 생산요소가 채굴, 이동하는 과정, 그리고 제작된 뒤 소비자에게 이동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내가 원했던 이야기는 주인공으로 선택한 대상의 삶을 원료 획득에서 시작해서 고철이 될 때까지, 또는 재활용이 될 때까지 계속 추적할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중략) 노트북이나 자명종보다는 빨간색 인조 양털 조끼의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전 세계의 모든 것이 모든 것과 연관되어 있는 오늘날의 상황을 훨씬 잘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p.9, 13)

인조 섬유로 만들어진 양털 조끼는 근대화의 핵심적인 원료인 석유에서 탄생한다. 그래서 가장 대표적인 석유 산지인 두바이에서 양털 조끼의 여정이 출발한다. 석유는 유조선을 타고 노동비가 싼 방글라데시로 가서 합성섬유의 원료가 추출된다. 선진국에서 들어온 플라스틱 폐기물이 원료로 쓰이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저임금으로 노동착취를 당하고 불안정하며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일하는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의 현실에 주목하기도 한다. 방글라데시를 비롯한 제3세계 저임금 노동자들의 열악한 모습은 선진국 자본의 요구와 연결되어 있는 세계화의 한 단면이기 때문이다.

같은 날 오후 8시. 8시에서 8시까지 12시간 지속되는 일상적인 근무 시간이 지났다. 타슬리마는 벌써 며칠 동안 재봉틀에 앉아 있었던 사람처럼 온몸이 뻐근했다. 그러나 타슬리마와 다른 여공들은 재봉틀을 멈출 수 없었다. 소문은 사실이었다. 독일에 보낼 인조 양털 조끼 1천벌 물량을 내일 오전까지 완성해야 했던 것이다. (p.83)

적절한 삽화는 줄글에서 감초같은 역할을 한다.

저임금 노동력으로 만들어진 양털 조끼는 곧장 저자가 사는 독일이 있는 서쪽으로 곧장 가지 않는다. 방글라데시 동쪽에 있는, 세계화 시대를 이끄는 동남아시아의 허브 도시 싱가폴을 일단 거친다. 세계화 시대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는 핵심적인 소수 세계도시의 결절 기능을 새삼 느끼게 해 준다. 싱가폴에서는 유럽의 여러 도시 행선지별로 물건이 분류된 뒤 컨테이너선에 적재된다. 이제 배는 싱가폴을 출발해서 독일로 가는데, 이 과정에서 여러 국적의 사람들의 도움을 거쳐 여러 국가를 거치게 된다.

노이볼트 선장은 자신의 배가 어느 나라를 위해 일하는 지 설명할 때면 언제나 심호흡부터 먼저 했다. 월드 스타는 독일의 한 해운 회사에 소속된 화물선이었고, 사장이 오스트리아 사람이고 본사는 홍콩에 있는 노르웨이 기업을 위해 운항하고 있었다. 지금은 파나마 깃발을 달고 운항 중이었고, 선장은 독일인에 선박 엔지니어는 영국인이었으며, 나머지 선원들은 모두 필리핀 사람들이었다. 월드 스타는 한국의 대우 조선에서 만들어진 배였고, 현재 중국과 인도, 태국, 방글라데시, 오스트리아에서 생산된 제품들을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 에스파냐, 영국, 네덜란드, 독일, 발트 해 국가들의 시장을 위해 운반하고 있었다.(p.101)

소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화를 이해하기 위한 참고 자료도 종종 실려 있다.

컨테이너선의 등장은 지난 반 세기 동안 세계적 규모에서 물자가 이동하기에 좋은 조건을 만들어주었다.

우리나라 이야기도 등장한다. 다만 중국이 치고올라와서 현재는 위기이지만...

독일로 도착한 조끼는 유통 과정을 거쳐 백화점에 진열된다. 그리고 저자가 조끼를 구입해서 얼마 간 입다가, 헌 옷이 되면 수거함에 버린다. 일반적으로는 물품의 생애 여정이 여기서 끝난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2차적인 소비자에게 조끼가 이동하는 것까지 간다. 저자는 우리가 '헌 옷'이라고 생각하고 버리는 옷이 사실은 제3세계 국가들에게는 '쓸만한 옷'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헌 옷 재활용 통으로 이동한 조끼는 다시 배를 타고 아프리카 세네갈로 가서, '헌 옷'을 '쓸만한 옷'으로 보는 소비자들의 손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식민지 시대가 종식했음에도 세계화로 인해 더욱 세네갈이 빈곤해지는 이유도 분석한다. 유럽 연합에서 보조금을 받고 만들어진 제품이 아프리카의 농업 및 제조업을 더욱 몰락시키는 모습 말이다. 이렇게 피폐헤진 경제 속에서, 아프리카 인들이 목숨을 걸고 배를 타고 유럽으로 이동하는 모습도 보여준다. 유럽인들이 입다 버린 헌 빨간 양털 조끼를 입고...

빨간 양털 조끼의 여정을 지도에 표시한 것.(p.199)

세계화라는 추상적인 개념은 이렇게 빨간 양털 조끼라는 구체적인 소재를 통해서 우리 일상 속으로 들어온다. 이 이야기는 가상의 이야기이고, 독일의 이야기이므로 우리와 별로 상관이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우리나라 버전으로도 충분히 응용 가능하다. 우리가 입는 옷의 대부분은 중동의 석유에서 추출된 합성섬유를 재료로 중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의 국가에서 저임금 노동력으로 만들어진다. 그리고 우리가 사용한 뒤, 그 헌옷은 다시 동남아시아의 저개발국으로 옮겨간다. 저개발국 사람들은 우리나라로 이주하여 외국인노동자가 된다. 이러한 스토리로도 이야기 구성이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의 물건을 구입하고 다른 물건은 그대로 내버려 두는 소비 행위를 통해서 어떤 제품과 회사가 이익을 얻게 될지, 어느 나라가 더 많은 제품을 수출할 수 있을지, 또 그 나라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어떤 근로 조건에서 일하게 될지를 동시에 결정한다. (p.197)

그래서 이 책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우리의 일상적 구매행위가 세계 여러 나라의 장소와 삶에 영향을 준다는 점을 깨닫고, 나아가 공정무역의 의미에 대해서 고민해 보자는 의도이다. 대안의 구체적 방안에 대해서는 책에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문제제기 측면에서는 충분히 그 의도를 전달할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된다. 세계화가 구체적인 공간에서 어떤 패턴으로 진행되는지, 그 과정에서 문제점은 어떤 것이 있는지에 대해서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학생용 책으로 기획되었지만 성인이 읽어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괜찮은 책이다. 이 책을 통해 학생, 성인 누구나 세계화와 그 영향에 대해서 밑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