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름의 작가로 조지핀 테이를 선정해 놓고 한 권씩 그녀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 『시간의 딸』을 읽고 끝났구나 생각했다. 이 여름이 끝났구나라고. 책 목록을 넘겨보다 아직 읽지 않은 책을 발견했다. 『크리스틴의 양초』를 사 놓고 잊어버리고 있었다. 여름은 끝나지 않았다. 바깥은 여름이다. 한 권의 책이 더 남았다. 조지핀 테이의 추리 소설 중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 『시간의 딸』은 역사적 사실과 더불어 읽는 재미와 즐거움을 선사한다. 역사를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질문을 던진다.
앨런 그랜트 경위는 범인을 발견하고 쫓다가 맨홀에 갑자기 빠져버렸다. 병원에서 종일 누워 천장의 금들을 이용해 지도를 그리고 탐구하는 그랜트 경위. 움직일 수 없는 몸으로 간호사들이 가져다주는 밥을 먹거나 침대 옆 탁자에 쌓인 책들을 쳐다본다. 새로울 것 없는 책들의 나열에 흥미가 떨어진다. 다음 페이지에 어떤 내용들이 나올지 충분히 예상되는 따분한 이야기들.
그랜트의 오랜 친구 마르타가 병문안을 찾아와 그랜트의 지루한 병원 생활에 활력을 가져다준다. 그랜트는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경찰로서 가진 감을 활용해 아무런 단서 없이 범인의 얼굴을 찾아낸다. 주름이 없는 얼굴에서 사람이 가져야 할 책임감이 없는 것을 간파해 범인을 맞춘다. 마르타는 누워 지내는 그랜트를 위해 얼굴들을 그린 초상화 뭉치를 건넨다. 초상화 상점에 가서 찾아낸 얼굴들을 주고 떠난 마르타. 그랜트는 초상화들을 보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랜트는 한 남자의 초상화를 바라본다. 오후 동안 바라본 초상화들 중에 가장 독특했다. 책임감이 강하고 막중한 의무감을 지닌듯한 얼굴을 가진 남자. 건강이 좋지 않아 보이고 어린 시절 겪은 고통이 남아 있는 듯한 얼굴. 그 얼굴은 리처드 3세였다. 세간에 알려진 그는 곱사등이, 괴물, 순수의 파괴자, 악당, 왕이 되기 위해 조카 둘을 죽인 잔혹한 폭군이었다. 그 남자의 이름을 모르고 초상화를 봤을 때 느꼈던 얼굴의 느낌과 삶의 행적이 일치되지 않는다. 그랜트는 먼저 간호사에게 남자의 인상이 어떤지 묻는다. 간이 안 좋은 것 같다는 대답. 의사는 그가 소아마비에 걸린 것 같다고 말한다.
리차드 3세가 가진 미스터리는 그가 조카를 어떻게 죽였는지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왕이 되기 위해 조카를 죽이고 왕의 자리에 올라 조카들의 어머니에게 연금을 주고 딸들을 돌봤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리차드 3세가 정말 조카를 죽이라고 지시했는지 그 배후에 누군가의 음모가 있었을지 그랜트는 병상에 누워 추적에 나선다.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그는 간호사의 역사 책을 빌리고 마르타가 가져다준 책들을 읽는다. 그랜트가 리차드 3세의 생애에 흥미를 가지자 마르타는 미국에서 온 민란을 연구하는 캐러딘을 소개한다. 그와 함께 리차드가 왕위에 오르고 얼마 뒤 전투에서 죽기까지 의심스러운 정황 등이 있음을 포착한다.
조지핀 테이의 『시간의 딸』은 역사의 해석과 기록이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에 의해서 쓰였을 수도 있음을 비판한다. 승리자의 입장에서 역사는 쓰이고 기록된다. 왕조가 무너졌을 때 실패의 기록은 잔인할 정도로 사실을 왜곡한다. 병상에 누워 역사 책을 읽으며 기록의 허점을 찾아내고 리차드 3세의 인간적인 면모를 밝혀낸다. 안락의자에 앉아서 사건을 추리하는 탐정을 넘어서 병상에 누워 역사의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그랜트 경위.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하는 그가 초상화로 만난 리차드 3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병원 생활을 하면서도 경찰로서의 품위와 능력을 잃지 않는 유머 있는 그랜트의 병상 미스터리, 『시간의 딸』을 읽고 있으면 숨이 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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