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 칼럼

21cbach
- 공개여부
- 작성일
- 2022.1.15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4년, 독일 라인란트 출신의 한 청년이 있었다. 애국심에 불타는 그는 자원했지만 참전할 수 없었다. 어린 시절 골수염을 앓아 다리가 굽고 왜소한 체격을 가져 현역 부적합 판정을 받은 탓에 비전투요원으로 복무했다. 독일이 전쟁에 패배하자 그는 조국의 몰락에 깊이 절망했다. 어린 시절부터 독서에 몰두해 어학과 역사 과목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고, 20대에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문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을 나온 후 저널리스트로 일하던 1925년, 조국의 미래를 책임질 위대한 지도자를 만나게 됐다. 전쟁에서 전사한 친구의 삶과 자신의 관념을 뒤섞어 반자전적인 소설 『미하엘』(1925)을 출간했다. 일기 형식의 소설 『미하엘』에는 어느 왜소한 청년이 좌절감에서 벗어나 조국의 미래를 책임질 지도자에게 헌신하기까지의 과정이 감상적인 문체로 기록되었다. 육신이 온전하지 않았던 그는 말과 글의 힘을 신봉했고, 대중을 설득해 조국의 미래를 밝힐 지도자에게 보탬이 되고자 했다. 그는 바로 나치의 선전장관이자 히틀러의 ‘입’이었던 요제프 괴벨스(1897~1945)다.
미술학교 진학에 실패한 후 실업자로 지내다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부사관으로 참전했던 아돌프 히틀러는 그다지 뛰어난 언술을 지닌 인물이 아니었다. 만약 괴벨스와의 만남이 없었다면 히틀러의 집권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인간의 나약함과 감성을 파고드는 괴벨스의 언어는 패전 이후 절망에 빠진 독일인들의 심성을 자극했다. 괴벨스의 선전으로 1928년 5월 선거에서 3%에 불과했던 나치당의 득표율은 1930년 9월에 18%로 급등했다. 1932년 대통령선거에서 히틀러는 결선투표에 진출했고, 1932년 제국의회가 해산된 직후 실시한 7월 총선에서 나치당은 37%의 득표율로 제1당이 되었다. 마침내 1933년 1월, 총리에 취임한 히틀러는 그해 3월 독일 국민을 계몽하고 선전할 ‘제국선전부’를 설립하고 그 장관에 괴벨스를 임명했다.
괴벨스의 선전술 원칙은 명료했다. 그는 대중을 신뢰하지 않았다. “선전은 쉽게 학습될 수 있어야 하고, 간단한 용어나 슬로건으로 명명하는 것이 좋다”, “대중은 이해력이 부족하고 잘 잊는다”는 소신을 지녔던 괴벨스는 간단한 언어로 연설문을 작성했다. 메시지를 가장 단순하게 가공하고, 이것을 끝없이 반복했다. 괴벨스는 민주주의의 치명적인 약점을 정확하게 파악했다. 최대 득표를 얻은 자가 권력을 잡는 민주주의 시스템에서 권력을 얻으려면 다수의 무지한 대중을 설득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괴벨스는 판단하고 비판하는 능력을 지닌 지식인들을 고립시키고 대중들에게 증오심을 주입하는 교활한 방식을 이용했다. 당시 나치의 박해를 피해 프랑스로 망명한 독일 비평가 발터 베냐민(1892~1940)은 영화, 확성기, 라디오, 활자인쇄술 등 ‘복제기술’이 정치 참여와 예술 향유의 장벽을 낮추어 계급의 격차를 허물 것이라고 예견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복제기술을 누구보다 유용하게 활용한 것은 괴벨스가 이끄는 나치 선전부였다. 괴벨스는 확성기 연설, 신문, 포스터, 유니폼, 음반, 라디오, 영화, 악단, 합창, 대규모 퍼레이드와 군중집회를 활용해 군중심리를 자극했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가혹한 배상금과 군비(軍備)가 제한되는 굴욕을 겪은 독일 국민은 괴벨스의 선전에 열광했다. 괴벨스는 “분노와 증오는 대중을 열광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라는 사실을 십분 활용했다. 감성에 물든 대중의 증오는 쉽게 증폭된다. 특정 집단을 증오하고 독일 ‘민족공동체’ 의식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괴벨스는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증오가 증폭될수록 대중이 영웅을 갈망한다는 것도 괴벨스는 잘 알고 있었다. 좌절을 겪은 자들은 아래로부터의 결정보다 위로부터의 지배를 더 편하게 느끼게 마련이다. 나치 선전부는 오로지 총통(히틀러)만이 유대인으로부터 민족을 구할 수 있는 영웅이라고 떠들었다. 괴벨스는 히틀러에 열광하는 대중을 보며 이렇게 적었다.
“대중은 지배자를 기다릴 뿐 자유를 줘도 어찌할 바를 모른다.”
괴벨스의 선전에 열광한 독일인들은 불과 몇 년 후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고, 그의 말과 글처럼 대규모 학살이 이어졌다. 전쟁 중에도 괴벨스의 선전은 독일인들의 사기 고양에 효과적이었다. 1943년 2월, 스탈린그라드 패배로 공포감이 고조되자 괴벨스는 라디오에서 유명한 ‘총력전 연설’을 통해 소련과 맞서는 독일인들은 유럽의 자유를 수호하는 방파제라고 역설했다. 그 결과 독일군의 사기는 다시 높아졌고, 전쟁은 더욱 격렬해졌다. 1945년 4월, 소련군이 베를린을 완전히 장악하기 직전 괴벨스는 가족들과 함께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괴벨스의 탁월한 선전술은 종전 이후 많은 연구를 낳았다. 히틀러를 대변한 ‘악마의 혀’라는 비판을 받았으나 괴벨스는 처음부터 ‘악마’가 아니었다. 그는 지적이고 가정적인 인물이었다. 위법으로 권력을 잡은 것도 아니었다. 나치를 연구한 사람들은 이 자명한 사실에 경악했다. 괴벨스의 선전술은 오늘날의 정부나 언론도 자주 활용한다.
“선동은 문장 하나로도 가능하지만, 그것을 해명하려면 수십 장의 문서와 증거가 필요하다. 대중들은 해명보다 선동 내용을 더 잘 기억한다.”
너무도 유명해진 이 말은 마치 오늘날 언론의 치부를 고백하는 것만 같다. 언론이 흑색선전과 폭로로 불리한 이슈를 바꾸며 특정한 내용을 반복 선전하면 대중들은 쉽게 그 논조를 답습하게 된다. 언론은 좌절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입하면서 증오할 대상을 은근히 지정하기도 한다.
괴벨스 시대와 달리 오늘날 디지털시대의 대중들은 누구라도 선동의 주체가 될 수 있다. SNS에 올린 글이 사회적 파장을 낳을 때 정보를 생성한 주체는 강렬한 효능감을 느끼게 된다. 대다수 사람들이 SNS와 블로그, 카톡에 실제보다 나은 이미지를 올리고 만족감을 얻는다. 정치인들도 복잡한 설득보다는 간단명료한 메시지로 입장과 정책을 홍보한다. 괴벨스의 말처럼 그것을 논리적으로 반박하자면 몇 배의 노력이 요구된다. 그리고 반박과 재반박이 거듭될수록 상세한 내용보다는 간단한 단어와 강렬한 이미지만 남는다. 괴벨스를 연구한 독일 저널리스트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1952~)는 저서 『괴벨스, 대중선동의 심리학』(2006)에서 오늘날 정치와 언론, 마케팅에서 활용하는 ‘효율적인 홍보’ 대부분이 괴벨스의 선전술과 비슷하다고 지적했다. 괴벨스의 언어는 대상과 강도를 달리한 채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괴벨스의 선동술을 읽을 때마다 여전히 냉전적 질서와 적대적 언어가 지배하는 우리 사회의 익숙한 풍경들을 떠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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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