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을 보는 순간 『오디세이아』의 '노맨(No Man)'이 떠올랐다.그리고 『오페라의 유령』의 에릭도 함께.이름을 감추는 존재.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람.존재를 거부하면서도, 누구보다 존재를 증명하고 싶어 하는 사람.현대사회는 어쩌면 '노 피플 존'으로 가득하다.믿고 읽는 작가 정이현.그녀의 날카로운 메스 앞에서는 어떤 상처도 끝내 숨지 못한다.9년 만의 신작.오랜 침묵 끝에 돌아온 작가는 그 시간 동안 스스로를 지우며 작품만 남기려 했던 것은 아닐까.'노 피플 존'을 오래 통과한 사람처럼.첫 번째 단편 「실패담 크루」를 읽으며,실패조차도 일등이어야 한다고 믿는 현대인의 초상을 씁쓸하게 바라보게 된다.9편의 단편 작품 모두 훌륭하다. 하지만 그 중에서 「실패담 크루」는 가장 먼저 자신의 처지를 뼈 아프게 되돌아 보는 마력을 지닌 '실패'의 재발견이다. 아, 실패에도 급이 있구나, 계단이 있구나, 사다리가 있구나, 그리고 실패라는 단어에 이미 보이지 않는 존이 있구나. 하는.하지만 속상했다. 노력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임을 쓸쓸히 자인했다. (실패담 크루, 20쪽)하나의 단편을 다 읽고 나서 느끼는 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또 다른 실패는 아니다. 그 정도로 내가 연약한 존재는 아니기 때문이다. 다양한 독서를 통해 다져진 내공은 '실패'가 아니라 '시선'을 느끼게 해 준다. 내가 모르는 세상이 여기에도 있구나, 하는. 그건 재발견이다.작가가 밝힌 것처럼, 잇몸 사이사이 끼여 있는 음식물을 제거해주는 치실과 같은 작품이 되고 싶다 한 그 소망은 어느 정도 이룬 것 같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그 zone에 대한 관찰은 예리하고 아프고 관통한다.줌파 라히리의 <축복받은 집>의 한 단면을 보는 느낌도 든다. 우리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타인의 생각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한 평생 살면서 고치집처럼 둘러 쳐진 그 견고하면서도 여리여리한 편견과 고정관념과 당연하다고 느끼는 각자의 상대적인 가치관.그래서 노 키즈 존, 노 시니어 존, 급기야 저자의 제목처럼 <노 피플 존>이 생기지 않는가. 나도 적당한 거리를 좋아한다. 내 사생활을 침범하지 않는 적정한 거리를 두고 싶어 한다. 지나치게 나를 배려하는 것도 불편하다. 그래서 아직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처음 보는 낯선 층에서 타고 내려오는 사람들에게 선뜻 인사하는 것도 어색하다. 어떨 땐 그냥 엘리베이터를 내려 보내기도 한다. 작은 공간에서 모르는 사람과 같이 몇 초를 같이 지내는 것조차 호흡이 부드럽지 않다.노 키즈 존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었을 때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은 있다. 지나치게 소란스러워서 타인에게 방해가 되는 인간이라면 그게 누구든 얼마든 어리든 또는 얼마나 늙었든 자신이 있는 곳에는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노 피플 존. (단 하나의 아이, 157쪽)동시대를 살아가면서, 동시대 이야기를 날 것 그대로 작품을 통해 만나는 것처럼 신비로운 것은 없다. 정이현 작가는 사회, 도시, 타인이라는 구조적 네트워크를 치밀하면서도 능청스럽게 그리고 부드럽게 표현한다. 책을 읽다 보면 사실은 그것이 바로 내 얘기임을. 내가 장막을 둘러치고 있고, 타인을 멀리 하고 있고, 타인을 불편하게 하고 있고, 너희는 나를 몰라, 속으로 외치며 혼자 비분강개하고 있음을 여실히, 그러나 조용히 깨닫게 해 준다.여전히 존재하는 계층의 문제는 얼마나 상대적인 것일까. 실패담 크루에서 적나라하게 만나볼 수 있다. 그건 이미지다. 극한대로 몰아 붙인 가정의 상황일 뿐, 우리는 적당한 간격의 사다리 안에서 복닥거리며 계층의 열등감 속에서 산화한다.오늘도 그렇게 불타 오른다.조용히 그러나 뜨겁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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