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사진
Bruce_Lee
  1. 나의 삼촌 브루스 리

이미지






  89.
  동구 형이 온 가족의 바람대로 서울에 있는 명문대에 합격하자 마을 입구엔 합격을 축하하는 플래카드가 나붙고 아버지는 돼지를 한 마리 잡아 동네잔치를 벌였다. 나는 이전에 아버지가 그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문중어른들은 가문의 영광이니, 동천의 자랑이니 하며 축하의 말을 건넸고 아버지의 주름진 얼굴은 막걸리로 불콰해져 하루 종일 실없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보람이란 바로 그런 경우에 쓰는 말인 듯 아버지는 더없이 뿌듯한 표정으로 호기롭게 술잔을 돌렸다. 문중에선 이미 대학을 마칠 때까지 학비를 대주겠다는 언질까지 있어 아버지는 더없이 흡족한 눈치였다.

 

  -여기서 뭐해? 안 나가보고…….
  내가 방에 들어갔을 때 형은 방바닥에 벌렁 누워 있었다.
  -아까 나가봤어.
  -아버지가 찾던데…….
  -나중에 나가보지, 뭐.
  형은 귀찮다는 듯 옆으로 돌아누웠다. 밖은 손님들로 왁자지껄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정작 잔치의 주인공인 형은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그러지 말고 한번 나가 봐, 조금 아까 안성 작은할아버지도 오셨던데…….
  내가 한 번 더 재촉하자 형은 발끈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씨발. 그깟 입학금 안 받으면 되지, 뭐 나가서 고맙다고 발바닥이라도 핥으라는 거야?
  나는 형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놀라 어리둥절한 얼굴로 쳐다보았는데 형은 시끌벅적한 밖을 쳐다보며 말했다.
  -촌놈들. 산골짝에 처박혀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줄도 모르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데?
  내가 따지듯 묻자 형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솔직히 난 여기가 지긋지긋해. 가난하고 무식하고 힘도 없는 것들이 어깨에 힘만 주고 다니면 다 되는 줄 아나본데 너, 지금이 어떤 세상인지 아냐? 인간이 우주선을 타고 달나라까지 가는 세상이야. 그런데 여기는 지금도 똥지게를 지고 다니잖아. 사람이 굶지만 않고 살면 다냐? 인간답게 살아야지.
  형이 말하는 인간다운 삶이라는 게 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우리 집이 가난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밥 세끼 안 굶고, 정상적으로 아이들 학교에 보내고, 라디오에서 나오는 연속극도 듣고 살면 그런대로 인간다운 삶 아닌가? 종태처럼 돈이 없어 학교에도 못 다니고 어린 나이에 방앗간에서 일을 해야 하는 고달픈 삶도 있는데……. 이때, 형은 다시 자리에 벌렁 누우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사람이 근대화가 되어야지, 근대화가. 안 그러면 짐승하고 다를 게 뭐가 있어?
  그제야 나는 비로소 희미하게 형이 말하는 인간다운 삶이 박정희가 말하던 근대화와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다운 삶, 근대화, 우주선, 달나라……. 나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지만 그때 나는 처음으로 형의 마음속에 우리와는 다른 어떤 복잡한 열망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그리고 우리가 다시는, 그리고 영원히, 이전처럼 참새를 잡으러 다니고 멱을 감으러 다니고 원두막에 누워서 별을 보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어쨌거나 그것은 매우 슬픈 일이었다.

  삼촌이 제대하던 해 가을, 온 국민이 영웅으로 믿었던 한 독재자의 죽음이 있었다. 초가지붕을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꾸고 새벽 여섯 시에 큰 소리로 음악을 틀어대며 근대화를 부르짖었던 바로 그였다. 엄마는 나라가 망하기라도 한 것처럼 동네아줌마들과 모여서 함께 울었다.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해 20여 년간 제왕으로 군림했던 독재자는 죽을 때까지 권력을 누리고 싶어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신뢰했던 한 부하의 총에 의해 살해됐다. 그것도 가장 안전하다고 믿었던 장소에서였다.
  온 나라가 공황상태에 빠져 우왕좌왕하는 동안, 독재자 밑에서 야심을 키우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승냥이 떼들이 날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천읍과 같은 시골에선 권력의 중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알지 못한 채, 때가 되면 씨를 뿌리고, 때가 되면 모를 내고, 때가 되면 김을 매는, 수백, 수천 년을 이어온 평화로운 일상이 계속되었다.
  삼촌은 제대한 뒤에 한동안 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지었다. 그는 군대에 가 있는 동안 무모했던 열정을 모두 씻어버린 듯 묵묵히 농사일을 거들었는데 당시 삼촌의 얼굴이 매우 편안해 보여 나는 그가 평생 농사꾼으로 살기로 마음먹었나보다고 생각했다. 공화정 역사상 가장 격렬하고 추악한 음모가 정권의 중심에서 진행되고 있는 동안, 아이러니하게도 삼촌은 인생에서 가장 평화로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지만 그것은 태풍이 몰아치기 직전, 잠시 찾아온 짧은 휴식일 뿐이었다.





좋아요
댓글
12
작성일
2023.04.26

댓글 12

  1. 대표사진

    블루

    작성일
    2010. 12. 21.

  2. 대표사진

    하시시

    작성일
    2010. 12. 21.

  3. 대표사진

    포스트맨

    작성일
    2010. 12. 21.

  4. 대표사진

    꽃들에게희망을

    작성일
    2011. 1. 12.

  5. 대표사진

    베비11호

    작성일
    2013. 10. 21.

Bruce_Lee님의 최신글

  1. 작성일
    2012.3.3

    좋아요
    댓글
    0
    작성일
    2012.3.3
  2. 작성일
    2011.6.13

    좋아요
    댓글
    33
    작성일
    2011.6.13
  3. 작성일
    2011.1.25

    좋아요
    댓글
    15
    작성일
    2011.1.25

사락 인기글

  1. 별명
    리뷰어클럽공식계정
    작성일
    2025.5.20
    좋아요
    댓글
    244
    작성일
    2025.5.20
    첨부된 사진
    첨부된 사진
    20
  2. 별명
    리뷰어클럽공식계정
    작성일
    2025.5.19
    좋아요
    댓글
    159
    작성일
    2025.5.19
    첨부된 사진
    첨부된 사진
    20
  3. 별명
    리뷰어클럽공식계정
    작성일
    2025.5.21
    좋아요
    댓글
    106
    작성일
    2025.5.21
    첨부된 사진
    첨부된 사진
    20
예스이십사 ㈜
사업자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