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속의 진주

아그네스
- 공개여부
- 작성일
- 2017.9.29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이 표현은 기계장치의 신을 뜻하는데, 고대 그리스 극작가가 극을 계속 끌고 가거나 주인공을 구해 줄 때 쓰던 장치로,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고대 평론가들은 사건의 전개는 주인공의 행동이나 성격에서 비롯되어야지 외부의 여떤 힘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딱 떨어지는 삶을 사는 이들이 정말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등장인물의 수가 일정하게 정해져 있고, 싸움이나 타락, 구원으로 이어지는 방황 따위는 없는 그런 삶은, 단지 형식과 관련한 관습이자 문학적 규정일 뿐이다. 어떤 의미 있는 사건이든 그것을 추적하다 보면, 계산 가능한 것의 지평 너머로 난데없이 우연한 것, 낯선 것이 모습을 드러낸다. 며칠 전 저녁, 친구 카롤리나가 자신의 고향 보고타의 투우장을 뛰쳐나간 황소 이야기를 해 줬다. 도시의 혼란스러운 광경에 겁을 먹은 황소는 어느 건물의 엘리베이터로 뛰어들었고, 거기서 어떤 남자를 거의 죽기 직전까지 들이받았다고 한다. (108p)
(중략)
성 프란체스코는 젊은 시절 말라리아에 걸려 군대에서 돌아온 뒤, 요양 중에 자신의 영적인 운명을 깨달았다. 모기 한 마리가 그런 영적인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어쩌면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아이를 받았던 의사가 손을 씻지 않아서 그녀가 분만 후 열병에 걸렸고, 결국 그녀는 물론 갓난아이까지도 죽음이라는 차가운 운며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기계장치의 신은 단순히 외부의 힘이 아니다. 고전 희곡에서 필수 요소였던 성격이나 운명이라는 단단한 매듭 바깥에 있기는 하지만, 한발 물러나서 크게 보면, 그 역시 우리 삶을 이루는 패턴 안에 있다. 그는 황소나 검은등제비갈매기, 모기, 세균처럼 수많은 형태로 존재한다. (109p)
멀고도 가까운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레베카 솔닛 저/반비/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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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