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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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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제국, 로마
글쓴이
디트마르 피이퍼,요하네스 잘츠베델 공편/이은미 역
21세기북스
평균
별점8.9 (30)
아그네스

서양문화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하지만 정치와 언어, 사고방식과 공공시설, 대륙의 전통 등은 고대 로마시대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한다. 고대 로마의 모습이 어떠했고 유럽 국가들에게 남긴 흔적이 무엇인지, 로마시대의 여성들은 어떤 위치에서 살았는지 등이 궁금해 서평단에 신청했는데 아쉽게도 떨어져 구매해 읽게 됐다.

 

 최근 출간된 이 책은 신화를 걷어내고 사실에 근접한 로마사를 바탕으로 썼다고 한다. 특징은 고대 로마사를 연대순으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시기별로 나누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테마들이 서로 교차하며 입체적인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이다. 1장 '세계질서의 기원, 로마'는 '군주국에서 공화국으로' 변화해간 로마를 담았고, 2장 '잔혹한 정복과 투쟁의 역사'는 로마가 '지중해 패권'을 차지하는 과정을 그렸다. 3장은 '제국의 이상과 정신적 토대'를 담은 '문화국가 로마'를, 4장은 '새로운 황제 시대의 서막'으로 '로마 공화국의 멸망'에 대해 다룬다. 

 

 

 수페르부스의 아들이 친척의 아내이자 덕조 높은 루크레티아를 겁탈하면서 에트루리아 왕조는 509년, 로마에서 쫓겨났다. 치욕스러움에 절망한 희생양, 루크레티아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60쪽)

 

  위 글은 역사가 리비우스가 로마에서 에트루리아 섭정시대를 마감하게 된 사건을 전하는 글의 일부다. 흔히 '루크레티아의 모욕(강간)'이라 부르는 로마공화국의 건국신화 중 하나다. 그러나 문헌 속에 화려하게 그려진 왕권 붕괴 이야기는 대부분 전설일 가능성이 높고 성폭행자 섹스투스를 처형한 부루투스의 존재마저 불분명한 인물이라 한다. 기원전 6세기 경 로마의 귀족계급이 왕권을 붕괴했다는 사실만이 오늘날까지 확실하다고 한다. 이 신화를 통해 로마인들은 100년 후 강대국의 위치에 선 자신의 공화국이 '명예, 경건함, 용기' 등의 가치 위에 세워졌음을 보여준다고 한다.

 

 기원전 1000년 중반 무렵 중부 이탈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한 에트루리아인은 기원전 6세기경 타르퀴니아의 세 명의 왕들이 티베르 강 유역의 도시를 정복했다 한다. 그들은 로마인의 선구자이자 이웃이며 경쟁 상대였다. 19세기 고고학자 몸젠은 <로마사>를 통해 에트루리아인의 '폭력성과 약탈 경향'을 입증해냈는데 그들은 해적 행위를 통해 해군력을 키웠고, '사략선의 해적 행위'와 '갈고리'를 발명한 것으로 유명하다. 기원전 474년 키메 해전에서 그리스에게 압도적으로 패한 에트루리아인은 삼니움족의 급습으로 붕괴되었다. 기원전 396년 로마의 독재관 카밀루스에 의해 베이이가 정복돼 항구 오스티아가 식민지로 들어간 후 갈리아인들의 침략과 로마 세력의 확장으로 기원전 88년 로마제국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은 '무절제하고 무의미한 사치'로 인해 자멸을 초래했다고 평한다. 로마라는 이름도 에트루리아 혈족인 '룸르나', 라틴어 '로밀리이'에서 비롯한 것으로 추측한다.

 

 

 시칠리아 북부 앞바다에서 기원전 260년에 벌어진 밀레 해전에서 거의 서로 약 130척의 함대들을 똑같이 동원한 카르타고와 로마가 맞붙었다. 페니키아인들에게는 악몽 같은 일들이 시작되었다. 고대 이탈리아인들은 12척의 카르타고 함대들을 격파했고 그들을 지휘했던 한니발 기스코는 결국 도망쳤다. 해전 마지막에는 50척의 카르타고 함대들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거나 정복당했다. (143쪽)

 

 포에니 전쟁은 티베르 공화국 로마가 마지막으로 치룬 전쟁이자 고대 이탈리아의 동맹국들을 투입시킨 첫번째 전쟁이었고, 페니키아제국 카르타고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 로마와 카르타고의 1,2,3차에 걸친 전쟁이다. 로마와의 전쟁에서 활약한 한니발 장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카르타고의 몰락을 재촉한 '용병반란'은 페니키아 사회의 취약점을 드러내주는 것으로 평한다. '귀족사회이자 과두정치 사회'였던 카르타고는 왕보다 강한 장군들로 선출된 '100명의 남자들'로 이루어진 위원회가 있었는데, 몸젠에 의하면 양극단의 빈부 차이가 심한 '자본주의 체제'인 카르타고는 '관직 매매'와 '공공연한 매수 체제'로 인해 가난한 시민들과 상류층이 대립하는 가운데 용병들로 구성된 비싼 군대를 유지하고 있었다. 페니키아 사회에 흡수되지 못하고 이류 취급을 받는다고 느낀 용병들은 마침내 기원전 241년부터 238년 사이 로마와의 전쟁보다 더 강한 반란을 일으켜 페니키아제국의 존속 여부를 위태하게 했다. 결국 포에니전쟁으로 사라진 페니키아제국 카르타고에 대해 몸젠은 "타락한 엘리트들의 행동들은 반역 행위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고 평한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는 로마로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카이사르의 대부분의 군사들은 아직 갈리아와 스페인에 주둔 중이었다. 가장 신뢰할 수 있는 5000명의 군사들만 데리고 카이사르는 아드리아 해협 루비콘 강에 당도했다. 이 경계선을 넘는다는 것은 쿠데타를 의미했다. 왜냐하면 로마법상 군대를 끌고 수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군사반란을 막기 위한 소위 예방책이었다. (290쪽)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며 남긴 유명한 말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내란의 시작을 알리는 말이다. 하지만 폼페이우스가 그리스로 몸을 피하면서 카이사르는 기원전 48년에 다시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그 후 수많은 목숨을 잃은 내란 중 이집트로 도망간 폼페이우스를 쫓아간 카이사르는 어린 프톨레마이오스 13세로부터 폼페이우스의 목을 건네받고 왕과 공동으로 섭정을 하던 클레오파트라에게 반해 아들까지 낳았다. 이집트 왕국의 내분에 끼어들다가 결국 기원전 45년 로마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이듬해 종신 독재관의 행보를 시작한다. 그는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법률과 달력을 재정비하며 힘을 쏟았지만 '새로운 나라를 만들지는 않았다'고 평한다. 결국 카이사르의 거만한 행동과 막대한 힘은 반란꾼들의 모반을 계획하게 했고 폼페이우스 무리와 기존의 측근들, 그리고 카이사르가 신뢰했던 브루투스마저 결탁해 스물세 번의 칼에 찔려 죽게 된다. 카이사르에 대해 '로마공화국의 무덤을 판 자'라는 평가에 대해 필자는 '내란, 월권, 독재 등은 이미 그보다 앞서 일어나고 있었'고 '전제군주만이 평화와 사회질서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동안 한 권으로 읽는 세계사 같은 책을 통해 슬쩍 엿본 고대 로마사를 본격적으로 읽어보기는 처음이다. 읽기 전에는 어렵고 딱딱해 끝까지 읽어낼 수 있을까 염려했는데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많아 뜻밖에도 재미있어 술술 넘겼다. 아직 매끄럽게 소개할 정도로 친숙하지는 않지만 이 책을 계기로 또 다른 로마사를 읽고 이해를 더하고 싶다. 로마사를 처음 접하는 사람도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으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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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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