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

고독한선택
- 작성일
- 2020.3.27
진리의 발견
- 글쓴이
- 마리아 포포바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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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사는가?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포포바는 138억 년 전 작디작은 한 점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게 된 존재인 인간에게 묻는다. 이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어떻게 여전히 독립된 개인이라는 환상, 타자라는 환상에 굴복할 수 있다는 말인가?(P.14) 그러면서 대부분의 삶을 편협함과 착각과 환상 속에서 보내며 잘못된 방식으로 타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우리 대부분에게 그 사고의 얇음을 일깨운다. 우리는 평생 우리 존재가 어디에서 끝나는지, 나머지 세계가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알고자 애를 쓰며 살아간다. 우리는 존재의 동시성에서 삶의 정지 화면을 포착하기 위해 영원, 조화, 선형성이라는 환상에, 고정된 자아와 이해의 범위 안에서 펼쳐지는 인생이라는 환상에 기댄다. 그러면서 줄곧 우리는 우연을 선택이라 착각한다. 역사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며, 판단과 우연의 난파 속에서 살아남은 것들에 불과한데도. (P.15) 그 속에서도 아름다운 삶은 존재한다. 포포바는 우리에게 그 아름다움의 몇 컷을 전달한다.
이 책은 전기傳記물이라 분류할 수 있겠다. 포포바는 인간에게 의미 있는 영향력을 미친 인물 10명의 삶을 돌아본다. 그 이름은 요하네스 케플러, 마리아 미첼, 허먼 멜빌,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 마거릿 풀러, 찰스 다윈, 윌리어미나 플레밍, 해리엇 호스머, 에밀리 디킨슨, 레이철 카슨이다. 여성이 7명, 남성이 3명이다. 과학자도 있고 소설가도 있고 시인도 있고 저널리스트도 있고 조각가도 있다.
이들 중 다소 동떨어진 시대를 먼저 살았던 케플러를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은 서로에게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끼치거나 교류할 수 있는 시간대를 살며 서로의 자양분이 되었다. 우리 시대와 가장 가까운 카슨은 앞선 이들이 남긴 유산을 물려받아 인간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일깨웠으니 사상의 연대기에서는 같은 선상에 있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한다.
10명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이 리뷰에서는 개개인의 삶을 따라가지는 않으려고 한다.) 뛰어난 지성의 소유자로서 세상을 뒤흔든 사고思考의 변혁을 초래했지만 세상이 그들에게 가한 엄청난 압력을 이겨내야 했다. 그 압력은 무지와 편견, 기존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이기심 등에서 비롯되었다. 보통 사람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갈릴레이와 같은 시대를 살면서 지동설을 주장하고 행성의 타원 궤도를 밝힌 케플러가 견뎌야 했던 시대의 무게를 떠올려보자. 생명체를 죽음으로 이끌고 환경을 말살하는 살충제의 폐해를 고발했지만 이를 덮으려는 자본과 권력을 극복해야했던 카슨의 상황을 생각해보자. 여성에게는 문이 닫힌 학문의 길과 직업의 길을 걸으며 시시때때로 나타나는 각종 제약에 온몸으로 부딪혀 이겨내야 했던 미첼, 풀러, 플레밍은 어떠했을까? 이들 모두는 진리와 진실을 찾아 나선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확고한 주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공통점도 있다. 타고났든 만들어졌든 자신의 행로를 스스로 설정하고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자주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아무도 가지 않은 전인미답의 벌판에 서서 길을 트는 그들을 읽을 때면 이 세상의 모든 이는 이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들 대부분은 성소수자였다. 주로 동성애자였고 때로 양성애자인 경우도 있었다. 시대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적어도 자신이 사랑하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들은 용감하게 사랑했고 그런 사랑을 통해 다음 세대에게 새로운 길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동성애자였던 조각가 해리엇 호스머 편에 나오는 글을 그 사례로 가져온다. 호스머 이후에 태어난 모든 여성 예술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타인”으로 존재했던 문화 한복판에서 의미 있는 삶을 살고자 노력한 모든 창조적인 사람들, 동성애자임을 숨길 이유가 거의 없어진 문화 안에서 편안하게 커밍아웃할 수 있던 모든 퀴어 남녀들은 해리엇 호스머에게 빚을 지고 있다 (P.468). 성 차별에 대해서도 이들은 먼저 자각한다. 일찍이 케플러는 불학무식한 자기 어머니를 마녀로 몰고 간 상황을 돌아보며 성별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운명의 차이는 천공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 땅 위 문화의 작용에 따른 성별 구조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P,48) 시대 조건을 고려할 때 꽤나 앞선 사고라 할 수 있겠다. 성별이나 성 정체성이 인간의 가치를 좌우할 수 없다. 어떠한 형태라도 억압이 사라진 곳에는 창조력이 솟아오른다. 여성이라고, 성 소수자라고 그들을 얽어맬 권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
이들은 자신이 가진 천재성만으로 세상을 살아가지는 않았다. 이들 주변에는 이들을 이해하고 지원하고 격려하며 인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때로는 가족이,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이, 때로는 지성의 동반자 등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와 같은 주변 인물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들이 일궈낸 업적은 많이 작아졌을지도 모르겠다. 서로에게 시너지 효과를 내는 관계성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도 실수하고 두려워했다. 좌절도 했다. 하지만 거기에서 주저앉지 않았다. 뜨거운 용기로 이것들을 뚫고 나아갔다. 이들이 세상에 끼친 선한 영향력의 가치를 돋을새김하고 시대를 앞서 나간 이들이 이겨내야 했던 때로는 견뎌내야 했던 세상의 억압이 되풀이되지 않는 세상이 오기를 기대한다.
책의 프롤로그는 다른 어떤 책에서 읽었던 프롤로그보다 멋지다. 프롤로그를 읽으면 그 누구라도 이 책에 빠져 들리라는 기쁜 예감에 사로잡히리라.
그리고 이런 문장들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아래의 사진 속에서 ‘가장 먼 곳을 보는’으로 시작하는 문단을 읽어보라. 이와 같은 문장은 책 곳곳에 자리 잡고 내 찬탄을 불러낸다. 포포바가 만들어낸 문장은 정갈하면서도 진중하고 통찰력이 넘쳐 이 두꺼운 책을 읽어내도록 독려한다.

책은 포포바의 글로만 구성되어있지 않다. 각각의 인물들이 남긴 글이 상당량 인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남긴 글도 수없이 인용되어 이 인물들을 입체화해서 볼 수 있도록 한다. 포포바의 글이 큰 줄기를 이루며 흘러간다면 이 인용 글들은 그 세부를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일방적인 정보 전달이 아니라 읽는 사람의 판단을 유도하는 형식이다. 그런 흐름을 따라가며 읽기가 마냥 쉽지만은 않다. 멈춰 서서 생각하기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그래도 다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그 인물에 대한 이해도가 달라지리라 여긴다.
원문이 뛰어나리라 생각한다. 원서가 나온 미국에서도 호평이 이어졌으니까. 그런데 한국어 번역 역시 뛰어나다고 평가하게 된다. 처음에는 번역가 소개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는데 내 편견이었다. 문장을 읽기 좋게 만들줄 아는 번역가라고 본다. 이 번역가의 다른 작품이 기대된다.
사실 10명 모두에 대해 똑 같은 깊이로 읽게 되지는 않았다. 케플러, 미첼, 호스머와 카슨에 관한 내용이 가장 새롭고 흥미로웠다. 디킨슨은 시의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워서 힘든 구간이 있었고 풀러는 왜 이렇게 많은 장을 할애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지금도 그렇다.) 멜빌이나 다윈, 플레밍은 다음 얘기를 풀어나가기 위한 연결 고리로서의 역할만 눈에 띄었다. 내 이해의 부족함을 보충하기 위해 디킨슨과 풀러와 관련된 내용은 다시 읽어볼 생각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케플러와 미첼, 특히 레이철 카슨을 읽는 동안은 거의 황홀경에 빠졌다고 할 정도로 흡족했다. 이것만으로도 책값을 훌쩍 뛰어넘을 만큼 만족스러웠다.
안타깝게도 나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이들 중 5명―케플러, 멜빌, 다윈, 디킨슨, 카슨―만의 이름을 알고 있었을 뿐이다. 나 자신의 배움이 부족한 탓일 수도 있고 남성 중심의 역사에 익숙한 탓일 수도 있겠다. 더 많이, 잘 알려고 스스로를 부추겨야 한다. 또 한 번의 자각이다.
시작과 끝이 무로 장식된 찰나적인 존재인 우리는 어떻게 존재의 완전함에 도달하는가?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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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