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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또니우스
  1. 나의 미셀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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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버킷리스트 몇 가지쯤은 담아놓았을 겁니다.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가운데 얼마나 이룰 수 있을지 회의가 들면서도 설레며 손꼽곤 하지요. 또래 몇은 산티아고 순례길 완주를 로망으로 여깁니다. 성사된다면 당연히 저도 합류할 생각입니다.

 

재작년 가을 끝자락 또래들과 산행을 하던 차였습니다. 탄탄대로를 지나 막 한 구비 돌아서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갑자기 조붓한 오솔길이 열리는데 영화의 한 장면인 듯 낯익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가다듬어보니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 이미지가 겹쳐 보였습니다. 암송하며 그려보던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이 거기 오롯이 펼쳐져 있었던 것입니다. 단풍나무들도 오솔길을 따라 걸으며 몇 남지 않은 잎을 마저 떨굴 채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고요하며 애잔한, 가벼우면서도 번뇌를 끌어안은 듯 힘겨워 보이는 게 너무 안쓰러웠습니다. 제 심경이 투영되어서 그랬을까요.

 

마침 산행길 초입과 중간 기착지에서 산사에 들린 터라 그런 상념이 떠올랐는지 모릅니다. 그 가여운 것들이 저를 흔들어 놓았습니다. 금방 정이 들어버렸답니다. 좋은 건 혼자만 누리고픈 게 사람 욕심일까요. 그 애틋함을 또래들에게 내뱉기 싫었습니다. 어쩌면 산행 분위기를 망칠지도 모른다고 지레 경계한 탓도 있을 것입니다.

 

속으로 저만의 이름도 붙여봤습니다. [님의 침묵길]. 그날부터 혼자 그 길에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편도 6.9킬로미터는 조금 짧았습니다. 의식의 흐름대로 나부끼는 상념의 자락들을 가지런히 고르기에는 모자랐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 길이라면 왕복해도 지루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13.8킬로미터를 걸어 원점회귀를 했더니 딱 안성맞춤이었습니다. 세 시간여 꿈길을 걷는 기쁨의 코스가 드디어 완성된 것입니다. 번민과 명상과 결단의 전 과정을 완결할 수 있는 나만의 순례길이 정해진 셈입니다. 가보진 않았지만 산티아고 순례길에 못지않을 거라고, 미니 산티아고 순례길로 여겨도 무방할 것이라 생각하며 혼자 뿌듯해했습니다.

 

[님의 침묵길]은 사계절 모두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봄이면 복수초나 얼레지 같은 야생화들이 생명의 기운을 내뿜곤 했습니다. 덤으로 고사리나 곰취 같은 먹거리를 주기도 했습니다. 가을엔 애기단풍들과 눈을 맞추며 천천히 걷다 더러 알밤을 줍기도 했습니다. 겨울 매서운 시절에도 온몸 꽁꽁 동여매고 산행길에 올랐습니다. 인적이 완전 끊겨 더욱 좋았습니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길을 걸으며 세상 잡스런 것들과는 선을 긋고 홀로 고고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최고는 녹음 우거진 여름철이었습니다. 무성한 잎들은 볼썽사나운 것들을 다 가려주었습니다. 반들거리는 잎사귀 사이로 번지는 잔물결을 바라보다 그만 달뜬 소년이 되기도 했습니다. 온갖 시름 내려놓고 가벼우면서도 충만한 지경에 이르곤 했습니다. 흰 꽃들이 언뜻언뜻 고개를 내미는 모습에 절로 미소가 돋기도 했습니다. 벌써 열매가 농익은 풀과 나무에선 향긋한 냄새를 풍겨 나왔습니다. 잔잔한 바람에 실려 새콤달콤 향기가 전해질 땐 여기가 진정 복숭아꽃 핀 마을 아닌가 싶기도 했습니다. 인적이 뜸한 길이지만 유독 발길이 닿지 않는 구간이 있습니다. 마침 그곳에 마련된 정자는 제 전용 쉼터입니다. 책 한 권 챙겨간 날엔 기둥에 기대어 거뜬히 완독할 수 있었습니다. 새소리 끊이지 않아 생동감을 북돋우고 물소리 백색소음으로 은은히 깔리는 가운데 부드럽고 선선한 바람결 느끼며 읽다보면 도끼자루쯤은 썩어도 괜찮았습니다. 그 길엔 웅장하진 않지만 나름대로 갖출 건 다 갖춘 계곡도 몇 군데 숨겨져 있습니다. 계곡 나무그늘 아래 바위에 걸터앉으면 단전호흡하는 선인들이 따로 없습니다. 시공간 이동 정도는 예사로 가능했으니까요.

 

이번 여름에도 [님의 침묵길]로 향할 것입니다. 배낭은 가급적 가볍게 채우고 생수는 두 곳 사찰에 들러 해결하려 합니다. 더위 따윈 아랑곳하지 않을 것입니다. 길 전체에 나무 그늘이 드리워져 있으니까요. 그리고 나무를 보고 숲을 헤아리려 합니다. 해마다 키가 자라고 몸피 굵어지는 나무처럼 나의 내면도 단단해졌으면 좋겠습니다. 또래에게, 이웃에게 힘을 주고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한 소식 깨치려는 이들에게 아낌없이 자리를 마련해주는 숲 그늘 같은 그런 사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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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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