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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중독
  1. 2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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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표기
양파 공동체
글쓴이
손미 저
민음사
평균
별점9.6 (5)
활자중독

 


어떤 단어를 한동안 응시하다보면 전에 몰랐던 새로운 감각이 되살아남을 느낀다. 특히 순우리말. 환경미화원의 의무에 져 쓸려 버려야 했던 늦가을의 대표명사인 낙엽들. 나는 속절없이 눈물을 소환하며, 한 아름 비애를 느꼈다. 그리고 소슬소슬, 늦가을의 무력한 소연함과 함께 마시는 한 잔의 흑 커피. 오늘, 저 애는 존재감이 없이 어느 소슬이의 뱃속으로 추락했다. 슬프고 우울한 피로감에 지쳐.


 


한 번씩 스푼을 저으면 / 내 피가 돌고 / 그런 날, 안 보이는 테두리가 된다 / 토요일마다 투명한 동물로 / 씻어 엎으면 / 달의 이빨이 발등에 쏟아지고 / 난간을 따라 걷자 / 깊은 곳에서 / 녹색 방울이 튀어 오른다 / 살을 파고 / 모양을 그리면서 / 백지 위 젖은 발자국은 / 문고리가 된다 / 다른 몸으로 나갈 수 있겠다 ( ‘컵의 회화’ )


 


그러고는 고독과 오랜 지기인 단어들의 회동에 참가하기로 결심한다. 손미 시인의 『 양파공동체 』. 시집이지 않은가. 詩들이 모이는 집家이라 부르고픈 건, 나 또한 태생이 ‘고독’이라서 일게다. 겹겹이 쌓인 것들의 용도를 이리저리 재다 풀다 하는 일반인은 모르는 쓸쓸함을, 시인은 개성 있는 시어로 쏟아낸다. 혹 진작 좀 외로울 걸? 하고 계신가. 아니, 손미 시인의 시들은 기원 모르게, 한없이, 외로웠을 당신들과 나를 위한 위로이다.


 


- 이제 들여보내 다오. 나는 쪼개지고 부서지고 얇아지는 양파를 쥐고 기도했다. 도착하면 뒷문을 열어야지. 뒷문을 열면 비탈진 숲, 숲을 지나면 시냇물. 굴러떨어진 양파는 첨벙첨벙 건너갈 것이다. 그러면 나는 사라질 수 있겠다. / 나는 때때로 양파에 입을 그린 뒤 얼싸안고 울고 싶다. 흰 방들이 꽉꽉 차 있는 양파를. ( ‘양파 공동체’ 中 )


 


가슴만이 표현할 수 있는 고적함은 사물의 그것도 쉽게 알아본다. 옷걸이에 걸린 후줄근한 점퍼에게 표정과 동작을 입히고 있는 사람은 자주 고독으로 웅크린다. 무릎 깊이 파묻힌 뒤통수에게 말 걸어 줄줄 아는 백열등. 나는 그가 고마워 다시금 고개를 쳐든다. 잠깐이나마 밤 대신 낮을 준 그. 책상은 시인에게 백열등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책상다리를 끌고 왔어 / 웅크리고 앉아 흰 과일을 빗질하는 밤 / 나무 책상과 내가 마주 본다 / 너무 많은 생각을 하면 잡아먹히게 될 거야 / 책상이 걸어와 / 내 귀퉁이를 핥는다 / 그래, 이토록 그리웠던 맛 / 나를 읽는 / 책상 이빨 / 내 몸에서 과즙이 흘러 우리는 / 맨몸으로 뒤엉킨다 / 네 위에 엎드리면 우리는 하나 또는 둘이었지 - ( ‘책상’ 中 )


 


빗방울 입은 미끄럼틀 앞에서 망연자실한 꼬맹이들, 그들을 바라보는 나. 그럼, 우리는 공동운명체? 우리에 속한 미끄럼틀에게 한 마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스러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너에게 심심한 위로를...’ 검박한 무료로도 거뜬한 너에게 따스한 입맞춤을 보내곤 하는 우리들의 발에게도. 가랑비가 내리던 어제, 덕분에 너는 하루 동안 사색할 수 있었겠다.


 


좀, 앉을게 / 구둣발로 들어왔다 / 여기 좀 있을게 / 네 속에 - / 몸을 말아 넣으면 / 미끄러운 것에 눌리는 꿈을 꾼다 - / 그만 좀, 앉을게 / 이제 / 나도 너의 살점인데 ( ‘미끄럼틀’ 中 )


 


제발 목소리 던져 줄 누군가라도 있으면, 다정하게 되받아쳐줄 텐데... 음악을 켠다. 이어폰을 낀 다크서클녀가 두려운 거울도 흐린 미소를 띤다. 그 앞에 누운 비누와 칫솔, 치약들도 저마다 짝이 있는데... 이런 생각들을 잡아먹는 낯선 이가 곁에 있다는 착각, 환청이 들릴 때가 있다.


 


- 번개 치는 날 / 거울에서 한 번씩 손이 나왔다 / 분홍 타이즈를 신은 아이가 제물대에 올라가고 / 어머니 신전에 있는 거울이 / 한순간에 꺼지는 날 - / 번개가 치면 내가 아닌 것들이 내린다 ( ‘누가 있다’ 中 )


 


그래, 우리끼리는 더 이상 외롭다 말자. 우리에겐 지척에서 크게 울어주는 시계초침이 있고, 간헐적으로 노래해주는 비가 있고, 무엇보다 가슴을 녹여주는 당신들의 詩가 있지 않은가. 지금 내 곁엔 당신의 시를 데워주는 컴퓨터까지 있다. 윙윙, 사뭇 아픈 소리를 내며 일하지만, 내겐 그것이 우리들의 고독을 대리해주는 것만 같다. 이토록 사물마저 시린 늦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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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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