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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차일드
  1. 문차일드 소설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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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표기
은교
글쓴이
박범신 저
문학동네
평균
별점9 (281)
문차일드

시인이 소녀를 욕망하는 일화는 별자리만큼이나 무한한 것은 아니라 해도 희소하진 않다. 중년의 남성과 소녀 사이의 육체적 욕망은 굳이 '험버트 험버트'와 '롤리타'로 대변되는 거대한 소설적 그늘을 연상하지 않아도 전혀 색다를 게 없는 소재이기도 하다. 여기 칠순에 이르는 노시인과 시인이 사랑하는 젊음의 총아인 열일 곱 소녀, 거기다 문학적 재능이 전무하다는 것만 빼면 제법 건실한 시인의 중년제자가 펼치는 치정극에 가장 새로울 것이 있다면, 전작『촐라체』와 『고산자』로 기성의 팬들과 젊은 독자들을 동시에 충족시킨 박범신의 신작이라는 데 있다. 『은교』는 시인의 묘사 안에서 관능의 영력을 극대화하여 그네들의 욕망이 손끝으로 만지는 것처럼 다가오는 치밀하기 그지없는 소설이다.



 


노화가 추한 것인가, 노인의 욕망이 추한 것인가? 건강한 욕망을 젊음의 영역이라고 정해놓은 바 없으나, 노인이 소녀를 추구하는 것, 노시인이 은교를 욕망하는 것은 추악한 일이라고 시인의 제자는 질겁한다. 시인의 영감으로 다듬어진 은교는 실상 별다를 것이 없는 평범한 소녀에 불과하지만, 사랑이란 것이 어디 그런가? 눈에 들고, 마음에 드는 순간, 유일무이한 존재로 화하는 법칙에 충실할 뿐임을 우리는 안다. 『은교』는 노골적인 성애묘사에 중점을 두는 것도 아니면서, 소녀를 사이에 둔 사제 간의 치정극이 무르익어갈수록 고조되는 성적에너지가 팽배해간다. 타이밍의 문제일 뿐 파국이 예정되어있다는 것을 결코 지울 수가 없어, 원숙한 중견작가의 온유한 멜로드라마를 예상했다면 극히 다른 반향이 되쏘아 올 것이라고 단언한다.



 


노시인은 자신의 열망 안에서 매혹적으로 피어오르는 은교를 육체적으로 탐하는 중년의 제자를 질투하고, 제자는 노시인과 은교를 중심으로 점점 밀도 높아지는 일상을 질투한다. 단순한 치정극으로 묶여있지 않는 이 소설은 어느 순간 애욕이 아닌 예술의 중심부를 건드리기 시작한다. 평생 고아한 시인으로 살아온 스승와 빈곤한 문재로 고통받아온 제자가 대필 작가 관계로 엮이면서, 세속적 성공과 문단의 비평을 농락하는 사기극이 치정극과 맞물려 세 사람의 관계를 더욱 옥죄어오게 한다. 실제적으로 소녀를 탐하지 못하는 시인은 유령작가가 되어 세간을 비웃고, 소녀는 탐할 수 있으나 천재성에 예속되어버린 제자는 스승과의 관계를 전복시키는 순간을 욕망하기 시작한다. 애욕과 예술이 얽혀들면서 『은교』는 무수한 텍스트와의 유사성을 획득하는데 반해, 더욱 적나라하게 날뛰기 시작하는 정념이 소설을 박제가 아닌 생령처럼 구체화하기 시작한다.



 


노시인 이적요가 남긴 은밀한 노트에 빼곡히 들어찬 욕망의 광시곡은 그의 사후 1년이 지나면 폭로될 수 있도록 변호사에게 남겨져있고, 이제 막 전설의 영역에 들어선 시성은 자진해서 추문으로 획득되는 불멸을 얻을 판이다. 시인의 노트와 추문의 생존자 은교의 진술과 시인보다 앞서 비명횡사한 제자 서지우의 일기가 교차되며 등장하는 구성은 반전을 위한 장치가 아니다. 오히려 정해진 결말을 더욱 공고히 하며, 삼각관계와 대 문단사기극이 농익어가고, 위선과 위안이 버무려진 질투와 천재성의 외줄타기의 현장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시인의 설계대로, 고상한 척 가면을 쓰고 있는 세상을 향해, 어떻게 진실이 흉포성을 휘두르는지 목도하라 당부하면서. 어느새 공모자로까지 전락인지 격상되었는지 모를 입지를 부여받은 독자는 가쁜 숨을 가다듬을 겨를조차 없다.



 


'은교'는 시인들의 절대적 사랑을 받는 '영원한 여성'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이적요와 은교, 서지우와 은교의 은밀하고 끈적이는 관계보다 이적요와 서지우의 공생과 천적관계 사이의 불콰한 역학구조 안에서 왜곡되어버린 미성숙한 영혼이다. 이적요의 열망을 알면서도 필요이상으로 다가간 것도 은교이며, 서지우와의 부절절한 관계 속에서 윤리보다는 자기보호가 우선인 존재도 은교이다. 은교는 시심을 돋우고 영감을 자극하는 원천이라기보다 변질되어가는 욕망을 미추로 판단하지 않는 방관자의 면모를 지녔다. 무엇보다 세 사람 사이의 질투의 핵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 이적요와 서지우 사이의 애정, 애증, 독점욕, 살의, 회환으로 점철된 깊디깊은 유대관계를 간파하는 냉철한 목격자이기도 하다.



 


죽음과 맞닿아있는 듯한 전인미답 촐라체의 빙벽에서 배다른 형제 박상민과 하영교는 카르마의 업보를 비워내기보다는 힘껏 껴안을 생의 의지를 가지고 귀환했다(『촐라체』). 김정호는 지도가 나라의 것으로 귀속되는 것이 당연했던 흉흉한 시절, 민초들에게 제 몫의 정당한 실용을 되돌리기 위해 옛 산들을 절대 고독 속에서 넘나들었다(『고산자』). 작가 스스로 '갈망의 3부작'이라고 명명한 『은교』에 이르러, 생을 긍정하는 인간에 대한 경의가 폭발할 것으로 자연스레 예상했다면, 그 기대는 과연 충족된 것인가, 배신당한 것인가? 고작 내릴 수 있는 결론이란, 살아있기 때문에 욕망하고, 미완의 존재이기 때문에 불멸의 예술에 생의 전부를 걸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고요하다'는 '적요(寂寥)'를 필명으로 삼아 예술의 가치를 재단하고, 차등을 부여하는 문단을 조소하는 이적요의 소리 없는 뇌성이 인상적이다. 평생을 시작만 발표하여 시인의 고결함을 획득한 것도 자신의 의지였으며, 서지우를 내세워 저급한 것으로 치부되는 장르문학으로 대중성마저 확보한 유령작가행각은 명민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자신의 사후, 예술의 귀천을 논하는 잡소리를 일거에 침묵하게 하기 위해 계획한 자발적인 추문의 폭로는 일견 살풍경한 냉소의 정점처럼 보이지만, 예술에의 절대적인 헌신의 역설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애욕과 예술이 양날의 검이 되어 서로를 찔렀던 이 치정극에서 이적요, 서지우는 유죄를 면치 못하는, 두 개의 심장을 지닌 한 몸과 다름없는 공범자지만, 추문의 생존자 은교는 그 길이 가시밭길임을 알아도 시를 쓰기 시작한다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비로소 『은교』가 3부작의 완결이며, 생과 예술에 대한 결코 노화하지 않는 갈망임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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