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차일드 영화리뷰

문차일드
- 작성일
- 2008.3.20
어톤먼트
- 감독
- 조 라이트
- 제작 / 장르
- 영국
- 개봉일
- 2008년 2월 21일
그의 초기소설은 근친상간이며, 신체절단, 변태성욕이 수시로 등장하는 단편선을 포함해, 그 수위와 실험정신은 거의 극한에까지 다다르지 않았나싶다. 작가 스스로가 평단의 찬사와 세간의 몰이해의 간극을 자못 즐기는 게 아닐까 하는 섣부른 짐작도 해보곤 했는데, 이 한 권의 소설로 인해, 평단과 독자 사이의 간극은 극적인 화해국면을 맞이해 찬사가 부족할 지경에 이르게 되기에 이르렀다.
바로 이언 매큐언의 <속죄>가 그러하다.
외적으로 행해져 인간의 본성을 필요이상으로 드러내버리게 만드는 폭력은 <속죄>란 책은, 단번에 읽히지 않는 불편한 감각으로 지금껏 씁쓸하게 달라붙은 잔상이었으나, 그의 작품이 연달아 관심 있게 읽히는 것과 맞물려 영상화되어 주목을 받는 요즘, 여전히 불편하고 끈덕진 그 감각의 정체를 비로소 알게 된 기분이다.

스크린을 가득 채운 이언 맥큐언에서 파생한 [어톤먼트(속죄)], 아름답지만은 않은 이야기가 아름다워 보이고, 애틋하고 가슴 저미는 면면들이 극대화되어 다가오는 이 영화, 그녀의 속죄는 과연 이루어졌는가 하는 의문이 어느덧 사소해져버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의 첫사랑인줄 뒤늦게 깨달았던 정원사의 아들인 로비와 세실리아 사이의 성적인 암시와 긴장감을 추잡한 죄악으로 치부하기 전까지.

브라이오니에게 사촌 롤라의 강간범으로 지목당한 후 징병당한 로비, 저마다의 번민을 짊어지고 간호사가 된 탤리스 자매이야기가 펼쳐지는 장에 이르면, 지울 수 없는 추문과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전쟁과 용서받지 못한 공허한 속죄, 그 모두가 불멸의 사랑을 더욱 공고히 하고, 기진하게 만드는 것을 볼 수 있다.
전쟁과 연인에게서 격리된 시간들이 한 젊은이는 감히 죽을 수도 없는 사명감-세실리아에게 돌아가 그들의 이야기를 치욕이 아닌 열정의 사랑으로 다시 쓰고자 하는 열망-을 얻는다. 세실리아가 로비를 기다리는 동안, 브라이오니는 어쩌면 자기위안에 불과할 지도 모를 속죄의식을 시작한다.
과연 로비의 열망대로 이야기는 다시 쓰일 수 있을까?
로비와 세실리아와 브라이오니의 분출된 감정은 풋사랑에 빠진 연인들에게 구애의 시간을 되돌리고, 사춘기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소녀적 감상들은 죄악이 아닌 순수함으로 뒤바뀔 수 있을 것인가?
이안 맥큐언이 말하고자 하는 '속죄'는 그리 간단히 제자리를 찾을 수 있는 잃어버린 퍼즐조각이 아니다.

브라이오니는 혈관성 치매를 선고받은 시한부임을 밝힌다. 그녀가 13살의 그 날 이후, 속죄 대신 비겁한 도피와 자기연민에 빠져 결코 평온해지지 못했던 것이, 그 평생의 시간이 속죄가 아니었을까 한다. 용서하고, 용서받고, 씻을 수 없는 죄가 씻어지는 일이 일어날 수 없음을 기만하면서 살아온 작가가 마지막으로 담아낸 두 연인을 위한 허구의 해피엔딩, 그리고 모든 것을 망각하며 죽음이 이르게 되는 병을 선고받은 것으로 속죄가 완성된다. 비로소 브라이오니는 죽음을 앞두고서야, 생에서 그것을 망각할 수 있는 것을 허용받는다.

한 때 E. M 포스터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하는데 충실했던 머천트-아이보리 프로덕션([전망 좋은 방]과 [모리스], 그리고 [하워즈 엔드])의 뒤를 이어 워킹타이틀과 조 라이트 감독이 재현하려는 시도처럼 느껴질 정도로, 영국 문학의 빛나는 영상화 작업은 얼핏 거대한 성과로 다가오기도 한다.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의 고혹적인 히로인이었던 헬레나 본햄 카터는 이제 헐리웃으로 건너가 남편인 팀 버튼 감독의 작품들에 다소 억지스러운 여주인공들을 해내고 있으니, [오만과 편견]부터 [어톤먼트]까지 조 라이트 감독의 히로인이었고, 거슬러 올라가 워킹타이틀의 메가히트작인 [러브 액츄얼리]에서도 매력적인 히로인이었던 키라 나이틀리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고 잠시 생각했으나, 이미 영국영화와 헐리웃 영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캐리어를 넓혀가는 그녀에게는 무의미한 찬사에 불과하다.
조 라이트의 [어톤먼트]는 이언 맥큐언의 <속죄>와는 다르게 아름답지 못한 이야기가 아름답게, 애틋하게 가슴 저미는 면면들이 극대화 되어, 오히려 원작의 불쾌하기까지 하고, 온통 거슬리는 것 투성이의 살풍경함을 지나치게 반감시켰다. 두 번, 세 번 책장을 덮어버리고 완독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면서 비로소 이언 맥큐언이 전하려던 속죄의 의미의 끝자락을 잡은 나로서는, 이 영화의 매끈한(실상은 매끈하다기보다는 편의적인 장면전환의 힘에 의한) 전개에 그리 찬사를 보낼 수가 없었지만.
타이틀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는 한, 꼭 그래야만 할 것 같은 강박에 빠질 수밖에 없는 우리는 브라이오니의 속죄의식의 완성에 촉각을 곤두세우게 되지만, '속죄'란 과연 무엇이며, 누가 누구를 용서해야하는 것이며, 과연 이야기는 다시 써질 수 있는 것인가? 인생의 비틀린 행보를 다시 세우는 것이 과연 속죄로 가능한 것인가?

속죄란 자학에 길들여진 이의 죄의식을 미화하는 행위일지도 모르며, 결코 보상할 수 없는 무고한 이의 희생보다는 가해자의 자기위안을 위한 죄 갚음일지도 모른다. 브라이오니는 자신이 마땅히 행해야할 속죄에서 도망쳐 속죄를 창조해냈다. 로비가 다시 만들고 싶었던 세실리아와의 사랑의 결실이 소설화되어 불멸로 남는 것은 속죄를 충분히 지켜봤다고 믿는 모든 이들에 대한 조롱이자 자기연민일 수도 있다. 타닥타닥, 브라이오니의 정갈하고 질서정연한 세계를 위협하는, 마땅치 못한 애정의 행로들이 등장하는 장면들에는 여지없이 타자기 소리가 들려온다. 현실을 직시하기보다는 자신의 망상으로 재구성한 허구 속에서 세상이 원하는 결말을 창조해낸 그녀와 감히 그것을 반박하지 못하고 설복당하고 마는 우리는 이미 속죄의식의 가면을 나누어 쓰지는 않았는지.
영국영화계의 인재들이 자국에서 활동하지 못하는 상황에 개탄하기도 했던 안소니 밍겔라 감독의 부음을 들으며, 노년의 브라이오니를 인터뷰어로 [어톤먼트]에 등장했던 장면이 새삼 의미심장하게 되새겨진다. 고 밍겔라 감독의 명복을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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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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