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사진은 2009년 연극열전 시리즈 중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스틸 사진이다.

   배종옥씨 주연이라 관심이 갔고 꼭 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나지 않아 결국 못 봐서 아쉬웠다.) 

  유진 오닐의 뒤를 잇는 현대 미국 희곡의 거장, 테네시 윌리엄스. 그의 작품을 처음 만난 것은 문학 교과서에 나오는 유리 동물원이었다. 고등학교 영어 선생님께서도 테네시 윌리엄스와 유진 오닐의 작품을 좋아하셨기에 그 이름들이 낯설지 않았다. 

 또한,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안산 예술의 전당 모니터링 요원 활동을 하며 연극과 뮤지컬에 재미를 붙인 덕에 그 후로도 꾸준히 기회가 되면 연극 작품을 찾아보던 터라 연극 대본인 희곡을 읽어보는 재미를 오랜만에 느껴보고 싶었다. 

 처음엔 번역한 문장들이 조금 적응 안 되고 연기가 어색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는데 연극을 여러 편 보고 났더니 어느 순간 무대에서만 느낄 수 있는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와 에너지를 체험하는 것이 좋아졌다. 안티고네, 오이디푸스, 에쿠우스, 엘렉트라, 거미여인의 키스, 트루 웨스트, 리타 길들이기, 인디아 블로그, 그대를 사랑합니다, 그와 그녀의 목요일, 웃음의 대학, 우어 파우스트, 셰익스피어의 겨울 이야기, 키사라기 미키짱 등... 작품을 보고 난 후 밀려드는 복잡한 감정들도 좋았다. 

  "사람들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가다가 묘지라는 전차로 갈아타서 여섯 블록이 지난 다음, 극락이라는 곳에서 내리라고 하더군요." (p.12) 

  화려한 차림으로 불쑥 뉴올리언스에 있는 동생의 집을 찾아온 블랑쉬. 그리고 그녀를 따뜻하게 맞이하고 수발을 들어주는 스텔라. 거친 하류층의 남자로 욕망에 충실하고 때론 비열하기까지 한 제부 스탠리. 이 외에 주요 등장인물은 위층여자 유니스와 스탠리의 친구 미치 정도이다. 

  "사실주의는 싫어요. 나는 마법을 원해요! 그래요, 그래, 마법이요.! 

   .. 나는 진실을 말하지 않고 진실이어야만 하는 것을 말해요. 그런데 그게 죄라면 달게 벌을 받겠어요."

  (p.131~132)

  어떤 면에서 블랑쉬는 화려했던 과거에 사로잡힌 남부 아가씨 스칼렛 오하라를 떠올리게 한다. 다만 스칼렛이 현실의 세계에 빠르게 복귀했다면, 블랑쉬는 비참한 현실과 아름다운 과거의 간극을 허영과 환상으로 채우는 차이가 있을 뿐. 본 모습을 감추려 애쓰던 블랑쉬의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 이야기는 급속도로 파국을 향해 달려간다. 

  현실주의자이지만 무력하고 의존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스텔라, 인간이 가진 가장 원초적인 욕망의 결정체 스탠리. 유약한 미치. 극 중 어느 누구도 온전하지 않다. 이처럼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을 보면, 완전무결한 사람은 없다. 누구나 다 뒤틀리고 부서진 흠결이 있고, 그 흠결들이 충돌하며 드러나는 욕망과 비극이 그의 희곡이 가지는 특징 중 하나다. (특히 현실감각을 잃어버린 인물은 자주 등장.)

  폭주하는 욕망이라는 전차 위에서 결국 낙마해버린 블랑쉬가 가엾다. 그녀를 완전히 부숴버린 스탠리와 결혼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진실을 외면해버리는 스텔라의 모습에서 나는 비겁하고 추악한 인간의 내면을 보았다. 그래. 어쩌면 나또한 추악하고 이기적인 인간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