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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작가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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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몰골만 겨우 사람꼴 갖춰 밤 어두운 길에서 만났더라면 지레 도망질이라도 쳤을 터이지만 눈매만은 미친 듯 타오르는 유월 숲속 같아 내라도 턱하니 피기침 늑막에 차오르는 물 거두어주고 싶었네


 



- ‘폐병쟁이 내 사내’ 부분


 


 




  2001년 늦겨울, 시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를 펼치며 허수경 시인을 만났다. 10년 전에도 춥고 눈이 내렸겠지.


시집 발문을 신경숙 작가가 썼는데, 허수경 시인을 떠올릴 때 ‘폐병쟁이 내 사내’부터 그려졌는지 그와의 인연을 이 시로 시작했다. 김경주 시인 또한 마찬가지였나 보다. 시를 잘 외우지 못한다면서도 이 시의 앞부분을 멋들어지게 암송했다. 나 또한 이 시를 좋아하는지라 시인의 육성으로 전달되는 시어에 실컷 허우적거릴 수 있었다.


  이 세상 모든 굶주리는 사람들을 십수 년은 먹일 만큼의 쌀처럼 푸지게 내렸던 눈의 흔적이 거리 여기저기 남아 있는 지난 24일 저녁 산울림 소극장에서 ‘허수경을 사랑하는 선후배 시인들의 아름다운 詩和音展’이 열렸다.


  KBS ‘낭독의 발견’의 최원정 아나운서의 진행으로 10여 년 만에 고국을 찾은 허수경 시인을 비롯하여 함성호, 심보선, 김경미, 이병률, 김이듬, 김경주 시인의 육성으로 허수경의 신작 시집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에 실린 시를 감상했다. 덤으로 시인의 일상을, 한 시인의 시를 경애하는 다른 시인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함성호 시인은 ‘나의 도시’를 격한 음성으로 읊조렸다. 시어 하나하나가 가슴에 박히게 만드는 힘이 좋았다. 허시인의 시에는 마음을 움직이는 가락, 이른바 ‘뽕끼’가 있다는 어쩌면 그의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 오래전에 허시인이 직접 부른, 감히 제목을 물어볼 수조차 없을 정도로 이상한 노래였으나 후에 지하철에서 동냥하는 중년의 여인으로부터 들은 ‘사 팔자 물 팔자(?)’를 잊을 수 없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동향인 김이듬 시인은 진주에선 글을 쓰는 사람을 허시인을 만났느냐, 그렇지 못했냐로 나눠진다며, 그에 대한 반발로 그와 정반대 방향의 시를 추구하였으나 결국에는 에둘러 갔을 뿐이었단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로 허시인과 자신을 비유하며 ‘기차역에 서서’를 낭독할 때 울컥했던 건 시 때문이 아니라 허시인을 넘어설 수 없을 것 같은 감정이었음을 진솔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고백했다.


  말할 때는 부쩍 착해빠진 소년 같아지는 이병률 시인은 ‘여기는 그림자속’을 낭독할 때도 순수함이 몸에서 품어져 나왔다. 진행자의 질문에 이런 질문은 예상치 못했다는 솔직하면서도 재치 있는 답변이 인상 깊었던 심보선 시인이 낭독한 ‘아름다운 나날’도, 연극배우처럼 전달력이 뛰어난 어조로 귀보다 가슴에 먼저 와 닿게 만들었던 김경주 시인의 ‘너의 눈 속에는 나는 있다’도 끊이지 않는 메아리가 되어 당분간은 떠나지 않을 터.


  참,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의 공연도 낭독도 있었고, 김민정 시인은 낭독을 하지 않았지만 참석했다. 허시인이 독일에서 고고학을 공부하는 동안 부지런히 후배 시인들의 시집을 보내주었다는, 허시인이 세관에서 찾을 때마다 이 책들을 독일에서 팔 거냐고 의심받게 할 정도로 많이 보내주었다는 김민정 시인. 어쩌면 그 때문에, 아니 덕분에 허시인은 이렇게 말했는지 모르겠다.


  “이번에 출간된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은 어쩌면 저의 첫 번째 시집일지도 모릅니다. 앞에 출간한 네 권의 시집은 선배 시인의 영향을 받았다면 이 시집은 후배 시인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낭독회 참석하는 아침까지 예약 주문한 허시인의 신작 시집을 받지 못해 심히 불편했다. 배송되었다는 문자는 이틀 전에 왔으나 시집은 오지 않은 것이다. 일독하고 입장하려 했는데 말이다. 한데 지금 와 생각해보니 어쩌면 다행이다. 행사장에서 구입하여 사인을 받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 시인의 몸을 통과한 시어를 시인들의 음성으로 처음 읽을 수 있어 갓 따온 야채처럼 아삭아삭하게 씹혔기 때문. 이는 분명 독자의 기쁨이었다.


  김경미 시인이 낭독했던 시를 활자로 여러 번 읽으며 허시인의 ‘여기’를 생각한다.




 


 


언어


자연


과거


 



여기에서 놀았다


 



놀았다


 



더러는 햇빛처럼


더러는 빗물처럼


 



그 사이 사이


그대도 있다가 없다가


그랬다


 



옷을 다 벗고 욕탕에 들어가기 직전


몸 계곡 들판 등성이 수풀


 



한때 그대도 여기에 있었으나


그러나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 순간


이 자연은 과거가 되었고


 



지금 그대 없는 자연은


언어가 되었다


 



놀았다


 



더운 물속에 쓰라린 상처처럼


바람 앞에 얼굴을 가리는 새처럼


 



결국은 아팠다


놀았으므로 지극히 쓰라렸다


 



- ‘여기에서’ 전문


 


 






 


 


 


 인물사진허수경 시인 인물사진함성호 시인  김경미 시인


 


인물사진심보선 시인 인물사진이병률 시인 인물사진 김이듬 시인


 


인물사진김경주 시인 인물사진김민정 시인 인물사진 최원정 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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