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사

팬더대왕
- 작성일
- 2019.12.28
태평양 전쟁
- 글쓴이
- 유진 B. 슬레지 저
열린책들
2010년에 미국 케이블 방송사인 HBO에서 제작한 <더 퍼시픽>이라는 전쟁 드라마가 있었다. 국내에서도 케이블 방송 등을 통해서(또는 어둠의 루트로) 여러 번 방영했으니 밀덕이라면 누구나 적어도 한번쯤 보았으리라. 앞서 제작된 <밴드오브브라더스>의 태평양전쟁 버전인 이 드라마는 밴드오브브라더스와 더불어 그야말로 전쟁영화의 한 획을 그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전의 할리우드 전쟁 영화들이란 대개는 애국심과 희생정신에 충만한 몇몇 주인공들의 영웅적인 임무 수행이라는 진부한 내용들이었다. 불가능에 가까운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주인공 일행과, 그 주인공들의 앞길을 가로막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혹한 라이벌 간의 선악 대결이라는 이분법적인 구도, 적이 쏘는 총탄은 주인공에게 어지간해서 맞지 않으면서 적군은 주인공이 아무렇게나 갈기는 총탄에 장난감 병정들마냥 쓰러져 나간다. 오죽하면 스타워즈에서 잡몹 취급을 당하는 제국군 병사들에 빗대어 "스톰트루퍼 효과"라는 비아냥섞인 표현까지 나왔을까. 아무리 배우의 연기가 훌륭하고 액션이 화려해도 배경만 전쟁일 뿐, 액션 영화나 다름없다. 어차피 결말도 뻔히 정해져 있지만 우리는 그 과정에서의 긴박감과 액션신을 즐기려고 영화를 볼 뿐이다. <레마겐의 철교>같은 수십년 된 고전 영화부터 비교적 최근에 나온 <에너미 앳더 게이트>나 브래드 피트 주연의 <퓨리>도 좀 더 리얼해졌다는 것 외에 기존 패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느낌이다. 심지어 진부한 액션신에 갈수록 무덤덤해지는 관객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착한 주인공이 나쁜 적군을 얼마나 더 많이 더 잔혹하게 죽일 수 있는가 따위의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데 급급한 영화도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현실의 전쟁은 액션 영화가 아니다. 우리네 세상에는 절대 선도, 절대 악도 없으며 소위 "주인공 보정"이라는 것도 없다. 제아무리 용감한 병사라도 람보나 캡틴 아메리카처럼 영웅이 되겠다고 나섰다가는 변변히 활약하기도 전에 제일 먼저 총에 맞고 끝나버릴 것이다. 또한 병사들은 임무 수행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터미네이터가 아니라 감정을 가진 인간이다. 총탄과 포탄이 쉴새 없이 스쳐 지나가고 눈앞에서 친한 동료들이 사지가 찢겨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공포에 떨다가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 공포조차 무감각해진 채 적을 향해 미친듯이 달려나가며 소총의 방아쇠를 당긴다. 이성과 비이성 사이에서 끝없이 고뇌하고 결국에는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여 정신줄마저 놓게 되는 것, 그것이 진짜 군인들이다.
더 퍼시픽에서는 주인공이 없다. 아니, 드라마에 등장하는 모든 병사들이 주인공이다. 주연이든, 조연이든, 또는 대사 한마디 없이 0.1초도 되지 않아 스크린을 스쳐 지나가는 단역이든 말이다. 그들은 몇몇 주연을 돋보이기 위한 장난감 병정이 아니라 다양한 인간 군상으로서 자신들 나름의 전쟁을 하고 있다. 작렬하는 포탄에 팔다리가 뜯겨져 나가고, 길가 여기저기에 너부러진 채 파리 떼와 구더기가 새까맣게 우글거리며 썩어가는 시체들, 전쟁의 참혹함과 그 속에서 점점 파괴되어가는 인간성에 대한 묘사는 밴드오브브라더스 이상으로 리얼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전쟁 영화라기보다 전쟁 그 자체를 스크린에서 그대로 재현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더 퍼시픽이 여지껏 나온 모든 전쟁 영화 중에서 최고라고 감히 손 꼽고 싶다.
인문학 전문 출판사인 열린책들 출판사에서 최근에 신작 도서가 나왔다. 더 퍼시픽의 실제 인물 중 한 사람인 유진 슬레지 교수의 회고록인 <태평양전쟁 : 펠렐리우, 오키나아 전투 참전기 With the Old Breed: At Peleliu and Okinawa>이다. 실제로 이 책은 더 퍼시픽의 원작 중 하나이기도 하다. 영화 전반부가 과달카날에서 한손에 맥심 기관총 들고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람보마냥 일본군 때려잡아 하루 아침에 전 미국이 주목하는 전쟁 영웅이 된 존 바실론 중사의 이야기라면, 후반부는 유진 슬레지 이등병의 이야기이다.
유진 B. 슬레지Eugene Bondurant Sledge는 미국 남부 엘라배마 주 출신으로, 책에서도 나오지만 그 동네에서는 제법 알아주는 명문 집안 자제이다. 증조부는 남북전쟁 시절 남군 장교였으며 아버지는 잘 나가는 의사라고 하니 금수저인 셈이다. 그는 조지아 공과대학을 다니면서 해병대 학사 장교 후보생 과정을 밟던 중 전쟁이 끝나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참전하고 싶다는 욕심에 일부러 낙제한 뒤 이등병으로 자원 입대한다. 그리고 해병 제1사단 제5연대 제3대대 K중대 박격포 소대에 배치되어 M2 60mm 박격포 분대원을 맡았다.
슬레지 이병이 참혹한 전장에 처음 발을 들이게 된 때는 1944년 9월 15일부터 시작된 필리핀 동쪽의 펠리리우 섬 상륙작전이었다. 그는 이 때부터 1945년 6월까지 약 9개월 동안 펠레리우와 오키나와에서 싸웠다. 기나긴 태평양전쟁 전체로 보면 거의 끝물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진정한 지옥도를 맛본 셈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일본군 수뇌부는 타라와 전투를 비롯해 그 앞에 있었던 전투를 전훈으로 삼아 기존의 구태의연한 방어 전술을 통째로 엎었기 때문이었다. 집단 자살이나 다름없는 반자이 전술도 금지되었다. 일본군은 훨씬 효율적인 방식을 선택했으며 단 한명의 미군이라도 길동무로 삼겠답시고 더욱 발악적으로 싸웠다. 바꾸어 말해서 미군에게는 물론 그 전에도 지옥도였지만 한낱 맛보기일 뿐, 이제부터가 진짜였다. 슬레지로서는 그나마 태평양전쟁 최악의 싸움이었던 이오토 전투에 투입되지 않은 것만도 행운아였다랄까.
태평양전쟁 전황도와 슬레지 이병이 참전했던 펠레리우-오키나와 전투(붉은 칸). 태평양전쟁을 통틀어 이오토 전투와 더불어 가장 치열했으며 수많은 미군에게 악몽과 같았던 전투였다.
이 책은 슬레지가 진주만 기습 1년 뒤인 1942년 12월 3일 앨라배마 마리온 군사학교에서 해병대원으로 처음 입대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짧았던 훈련병 시절은 고되기는 했지만 그로서는 아직은 진짜 전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낭만과 기대감에 한껏 부풀어 있었던 햇병아리 시절이었다. 1944년 2월 28일 샌디에고를 떠나 남태평양 과달카달 북쪽의 파부부에 도착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여태까지 살아왔던 현대 문명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 남국의 섬은 덥고 습하면서 썩은 코코아 냄새가 코를 찌르고 사방에는 온갖 벌레와 뭍게가 넘쳐나는 끔찍한 곳이었지만 그래도 전쟁과는 거리가 멀었다.
드디어 모든 훈련을 끝내고 전장에 발을 디디게 된 "D-DAY"는 1944년 9월 15일이었다. 펠라리우 섬에 상륙한 그는 처음으로 전쟁과 살육, 죽음이 어떠한 것인지 비로소 절감하게 되었다. 더 퍼시픽에서는 5화부터 7화까지가 슬레지의 관점에서 본 펠라리우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최정예로 이름난 해병 제1사단은 전사 1,252명, 부상자 5,274명 등 도합 6,526명의 사상자를 냈다. 슬레지가 속해 있었던 K중대는 당초 235명에서 전투가 끝났을 때 무사히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85명에 불과했다. 전체 64%가 죽거나 다친 셈이었다.
"살려주세요. 오오 신이시여 살려주세요." 그 가여운 해병대원은 완전히 돌아버렸다. 전투의 극심한 스트레스가 그의 정신을 마침내 부서버렸다. "야전삽으로 얼굴을 갈겨버려!" 지휘 본부에서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다. 이어서 "퍽!"하는 불쾌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마침내 조용해졌다. - p.189~190
음트랙의 포수가 75mm 철갑탄 세발을 토치카 측면을 겨냥하고 쐈다. 철갑탄이 한발씩 발사될 때마다 귀에 익은 발사음이 고막을 때렸다. 곧바로 포탄이 표적에 명중하면서 폭발음이 다시 고막을 때렸다. 적병은 파편에 맞아서 죽지 않았다면 뇌진탕으로 죽었을 거라고 누군가 말했다. 그러나 먼지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일본군 병사 한명이 포탄 구덩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 p.215~216
일본군 병사의 입은 금니로 번쩍거렸다. 그를 끌고 온 해병대원이 원한 것이 바로 그 금니였다. 그는 케이바(KA-BAR, 미제 군용 나이프의 별칭)의 칼끝을 잇몸에 대고 나머지 한 손으로 망치질을 하듯 손잡이 밑바닥을 쳤다. 해병대원은 일본군의 입을 찢어 버렸다. 그것도 귀까지. 그리고 금니를 파내는 시도를 했다. 내가 고함을 질렀다. "그만 깨끗하게 죽여버려!" - p.220~221
"중사님 펠레리우섬에 대한 소감이 어떻습니까?" 내가 물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서부전선을 비롯해 온갖 굵직굵직한 전투에 참가했던 역전의 고참 용사는 내가 처음으로 참가한 전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진심으로 궁금했다. 나는 뻔한 대답이 나오리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자넨 이번 전투가 지독했다고 생각하겠지? 옛날 해병대에 있었다면 그런 생각을 못 했을거야.>와 같은 대답. 그러나 헤이니의 대답은 그게 아니었다. "끔찍했지. 여태까지 이런 전투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제 그만 고향으로 돌아가야겠어. 더는 못하겠어." - p.277 |
펠라리우 섬에서 현실의 전쟁이 책이나 영화와는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그 속에서 한때 선하고 순수했던 전우들이 인간성을 어떻게 상실해 가는지 절감했던 슬레지는 몇 달 뒤 새로운 전장으로 향했다. 오키나와였다. 미군에게는 태평양전쟁 최후의 싸움이자 최악의 악몽이 될 전장이었다.
그 순간 펠렐리우 상륙 작전 때의 그 무시무시하고 혼란스러웠던 온갖 장면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오키나와 상륙 작전에서는 일본군의 반격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웃고 떠들면 농담을 시작했다. 끊어질 것같은 팽팽한 긴장에서 해방되던 그 때의 기분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 p.327
맥은 우리 가운데 단 한명이라도 일본 놈들이 쏜 포탄이나 총탄에 쓰러진다면 자기는 케이바를 입에 물고 한 손에는 45구경 권총을 들고 적진으로 돌격해서 다 죽여 버릴 것이라는 말만 해댔다. 집행 유예의 4월은 고참 병사들까지 현실과 동떨어진 채 자기가 원하는 안전한 상태를 현실이라고 믿게 만들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그들 역시 잘 알텐데도 말이다. - p.342
혼돈 그 자체였다. 나는 격렬한 공포에 사로잡혔다. 다른 대원들의 얼굴에도 공포가 가득했다. 그 와중에도 우리는 있는 힘껏 경사면을 달려 올라가 빠른 속도로 참호를 파기 시작했다. 아침에 평온하고 아름다운 전원을 떠나왔는데 바로 그날 오후에 목숨을 앗아갈 포탄과 총탄 세례를 받아야 한다니. 펠렐리우 섬의 해변에서도 적의 맹렬한 공격을 받으며 상륙 작전을 펼쳤고 비행장을 가로지르며 적을 밀어내는 공격도 했지만 그때는 그래도 우리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번은 아니었다. - p.359
우리는 이미 펠렐리우 섬에서 엄청난 맹공을 많이 봤지만, 와나 계곡에서처럼 그렇게 여러 차례 반복해서 목표 지역을 포탄으로 불바다로 만다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이 포격과 폭격은 여러 시간, 그리고 또 여러날 계속 되었다. 일본군도 우리 쪽으로 수없이 많은 포탄을 날렸다. 나는 지긋지긋한 두통에 시달렸다. 끝없는 포격의 진동에 머리가 흔들리고 머리 안의 뇌까지 흔들려서 그랬을 것이다. - p.408
시체에서 풍기는 악취는 그야말로 압도적인 위력으로 우리를 짓눌렀다. 그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악취를 견딜 수 있는 방법은 하나였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끔찍한 현실을 외면하고 회색 구름이 천천히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면서 이건 현실이 아니고 그저 악몽일 뿐이며 이제 곧 꿈에서 깨어나면 나는 전혀 다른 곳에 있을 것이라는 말로 계속 주문을 외우는 것이었다. - p.422 |
저자의 묘사는 너무나 세세하면서 사실적이기에 당시의 상황과 저자의 감정이 그대로 이입될 정도이다. 참전 군인들의 회고록이란 저자들이 전문 작가가 아니다보니 아무래도 흐름이 중구난방이다. 또한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기억은 희미해지는 법이므로 사실과 다르거나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의도적으로 과장된 묘사를 하기 쉽다. 이 책은 그렇지 않다. 말 그대로 한편의 드라마이다. 하지만 저자에게는 결코 드라마가 아니라 현실이었다. 아무리 나름대로 메모를 했다고는 하지만 당시 여건에서 일일이 다 적을 수는 없었을 것인데 수십년 전의 일이 저자에게는 마치 어제 일인양 생생하게 머리속에 남아 있었던 것일까.
우리가 읽는 전쟁사는 대개 정치가와 장군들의 이야기이다. 전쟁이 왜 발발하게 되었고 어떤 과정을 통해서 어떻게 승리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것이다. 국난의 위기 속에서 국민들을 단결시켜 그 위기를 극복했던 지도자의 이야기, 자신의 부대를 어떤 식으로 기동하여 적군을 함정에 빠뜨린 후 섬멸한 장군의 이야기이다. 지도자와 장군들에게 국민 한 사람, 병사 한 사람은 위대한 승리를 거두기 위한 장기판 위의 말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입으로는 국민들과 병사들의 거룩한 희생을 찬양한다고 해도 그들에게는 마음에 와닿지 않는 다른 세상의 얘기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정치가와 장군의 영웅적인 이야기에 열광하고 우상으로 받든다.
하지만 최일선에서 진짜 전쟁이 무엇인지 경험하는 사람은 머나먼 후방에 앉아 있는 높으신 분들이 아니라 이름없는 병사들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런 무명의 어린 병사가 겪어야 했던 이야기이다. 여기에는 전장의 참혹함, 그 안에서 잃어서는 안 될 인간성을 잃어가는 모습을 담고 있다. 저자는 그것이 얼마나 잘 못 된 것이며 끔찍한 일인지 비난하고 혐오감을 감추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그저 막연한 인도주의를 내세워 남들을 싸잡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조국을 위해 자신의 의무를 다했던 전우들을 향한 존경과 찬사 또한 아끼지 않는다. 그 참혹했던 전장에서 모든 사람이 다 같이 미쳐버린 것도 아니며 마지막 순간까지도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인간애를 간직했던 사람도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전쟁이다. 올해에 읽은 책 중에서 가장 훌륭한 책 중의 하나라고 꼽는다. 밀덕이라면 일독을 권한다.
- 좋아요
- 6
- 댓글
- 0
- 작성일
- 2023.04.26
댓글 0
댓글이 없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