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

팬더대왕
- 작성일
- 2014.1.21
조선후기 화폐유통과 경제생활
- 글쓴이
- 정수환 저
경인문화사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을 보면 주막에서 밥과 술을 먹고 엽전 몇닙을 탁자위로 올려놓고 가거나, 권력가가 하수인에게 사례랍시고 "옛다"하며 엽전 꾸러미를 던지는 모습이 종종 등장하죠.
우리 조상들은 화폐를 언제부터 어떻게 사용했을까. 고조선 시대에 사용된 화폐가 유물로 발견되었다고 하니 우리의 화폐 역사 자체는 꽤나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한은 구리 화폐를, 옥저는 금은으로 만든 화폐를 사용하였으며 고려시대에는 직접 화폐를 주조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화폐는 일반인들이 실생활에서 물건을 사고 팔기 위한 수단이라기보다 어디까지나 중국이나 일본 등 주변국과의 무역에서 일종의 국제결재수단으로 사용되었을 뿐입니다. 일반인들은 조선시대 전기까지도 주로 물물교환이나 포목(布木)을 화폐 대신 사용했죠.
반면, 상업이 발달했던 중국은 전국시대나 그 이전부터 다양한 화폐를 사용했고 일본은 자체적인 화폐를 주조하기도 했으나 조악하여 주로 영락전과 같은 중국 화폐를 대량으로 수입해 사용하지만 그래도 전국시대나 그 이전부터 실생활에서 화폐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영주들은 가신들에게 월급을 줄때나 상인들과 거래할때 실물을 주기도 하지만 화폐도 많이 사용하는 등 화폐 경제가 상당히 발달해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서도 상당히 열악한 편이었다고 할 수 있죠. 일반인들은 철저하게 자급자족형 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필요로 하는 물건만 물물교환식으로 구매하는 식이었고 부자들은 창고에 곡식과 물건을 잔뜩 보관하다보니 물건이 돌고 돌 수 없는 구조일 수 밖에 없었죠.
그럼 사극 드라마처럼 우리 조상들은 화폐를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사용했을까. 그들은 화폐의 유용함을 몰라서 사용하지 않았던 것일까. 왜 화폐 사용이 그토록 느렸으며 조정의 행전(行錢)정책 과정은 어떠했을까. 화폐는 실생활에서 어떻게 사용되었을까.
도서관에서 다른거 빌리러 갔다가(그건 이미 대출중이었다는) 우연히 발견한 책입니다. 한국학 전문 출판사인 경인문화사에서 출간한 "경인한국학연구총서 시리즈" 중 하나입니다.
조선 후기 서민들의 생활에 대해서는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처럼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교양서적들도 많이 있고 여기에는 화폐에 대한 부분도 간략하나마 재미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이 책은 그런 교양서적이 아니라 논문을 책으로 펴낸 것이기에 훨씬 전문적이고 상세합니다.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매우 어렵고 딱딱하지만 조선 후기사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는 아주 흥미로운 내용이 많습니다.
저자의 연구에 따르면 17세기말까지 주요 결재 수단은 포목(베와 무명)이었다고 합니다. 예전에 어느 책에서 본 것인데, 선비가 글 공부하는 동안 부인은 그 옆에서 열심히 무명을 짜서 남편이 과거 보러 먼길을 갈때 행낭에 넣어주었다고 합니다. 그럼 선비는 한양까지 가면서 중간에서 민가에 들려 밥을 먹은후 결재할때 무명을 잘라주었다고 하죠. 세금도 곡식으로 내어야 했고 시장에서 뭔가를 사려고 해도 곡식이나 포목으로 결재하려면 부피가 커서 엄청 불편했을 겁니다.
특히 임진왜란을 거치며 명군을 통해 대량의 은화가 조선으로 유입됩니다. 이는 조선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경제 쇼크나 다름없었는데 명군은 조선땅에서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물자를 결재하거나 하다못해 병졸이 주막에서 밥 한끼 먹을때도 은화를 사용했습니다. 문제는 일부 국제 무역상들(주로 역관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평범한 조선사람들은 전까지 화폐라는 걸 구경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죠. 외국인 관광객들이 대거 들어와 달러를 내밀었을때와 비슷하지 않았을지.
그럼에도 우리 조상님들은 왜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화폐를 사용하지 않았을까요. 옆동네 중국에서 화폐 사용이 일상적이었던 점에서 화폐의 유용성을 몰랐을리도 없는데 말이죠.
이 책에서 저자는 그 이유에 대해 당시 조정내 입장이나 관료들의 의견이 어떠했는지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세종조에도 화폐 사용을 추진한 적이 있었으나 여러가지 부작용으로 금새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원칙적으로 화폐의 유용함은 인정하지만 화폐를 주조하는데 필요한 재료의 부족(조선에서는 구리가 나지 않기 때문에), 일반인들의 인식 부족, 위조 화폐의 가능성, 화폐 가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어려워 인플레이션을 조장할 가능성 등 현실적인 난관이 많았습니다. 호조라는 재정부처가 있었지만 한국은행처럼 현대적인 경제 정책과 물가 조정을 전담할 수 있는 중앙은행이 없다보니 매년 얼마나 많은 화폐를 주조해야 할지 조정하기 어려웠죠. 화폐란 너무 적어도 안되고 너무 많아도 안되는 법이죠. 정책의 일관성 또한 중요합니다.
선조때부터 화폐 주조가 거론되다가 인조와 효종을 거쳐 숙종때 상평통보를 주조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본격적으로 화폐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결정되는 과정이 하루 아침에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수십년에 걸쳐 장기간의 토론과 연구, 시도가 있었습니다. 엽전의 가치를 은본위로 했다는 것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정책을 졸속으로 추진하지 않고 장시간에 걸쳐 신중하게 고민하면서 부작용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한 점이 보입니다. 이런 점은 권력가의 성급한 욕심만 앞선 나머지 정책이 산으로 가는게 비일비재했던 다른 나라들과는 명백히 다른 점입니다. "저 새는 해로운 새다"라는 모택동의 말 한마디에 어느 누구도 비판 한마디 못한채 국민들이 농사를 팽개치고 참새 소탕에 나서 오히려 최악의 참사가 벌어졌던 것과는 실로 대조적이죠. 조선이라는 사회 자체는 비록 변화가 느리고 정체되어 있었지만 바로 이런 모습이 500년이나 이어지는 체제 안정의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17세기 이전까지는 화폐로 매매한 기록이 전혀 없다는군요. 즉, 문종을 배경으로 한 영화 "관상"에서 엽전을 사용하는 모습은 죄다 고증 오류이라는 뜻. 그런데 궁금한 것은 양반들이 기생집에 가서 한판 놀면서 기생들에게 팁으로 뭘 줬을까요. 설마 쌀푸대나 삼베를 줬을 리는 없고 옥같은 것을 주었을까요?
그러나 조정은 화폐 보급과 엽전의 가치를 보장하기 위해 관료들의 녹봉의 일부를 화폐로 지급하고 세금 또한 화폐로 받는 등 많은 노력을 하여 숙종 후기부터는 일반인들도 널리 사용하게 됩니다. 조선 후기 국내 상업이 점진적으로 발달하는데는 바로 이런 배경이 있었던 것이죠. 물론 조정에서 당초 예상했던 역작용들 역시 나타나 화폐를 지나치게 많이 주조하면서 인플레이션이 심화되고 재정에 큰 타격을 받은 점도 있습니다.
조선 후기에 발행된 각종 상평통보들. 구리는 일본에서 수입하였고 또 초반에는 화폐가 부족하자 중국돈을 수입하여 사용했다고 합니다. 고종말기까지 약 200여년간 사용되었다고 하죠.
상평통보의 주조는 상평청에서 담당했지만 관청들의 재정난 해소를 위해 다른 관청이나 지방의 감영에서도 주조하였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서로 크기가 다르고 화폐 발행량을 조정하기 어려운 점도 있었습니다.
화폐 주조소를 재현한 모습이랍니다.
이 정도면 지금 돈으로 얼마쯤 될까요. 세는 것도 힘들듯...--
고종조에 이르면 심각한 재정난과 화폐 남발로 인해 화폐 가치가 땅에 떨어집니다. 조선에 관광온 어떤 미국인이 경비로 쓰려고 얼마의 달러를 엽전으로 바꿨더니 무려 수십만냥에 달해 거리에 잔뜩 쌓아놓고 찍어놓은 사진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밥 한끼 먹으려면 수백냥씩 들고가야 했을지도. 바이마르 정권시절 독일 국민들이 화폐가치 폭락으로 빵 하나 살려고 돈을 리어카에 실고 다녔다고 하는데 지폐는 가볍기나 하지 엽전은 들고다니는 것도 문제. 차라리 녹여서 다른걸로 쓰는게 더 나았을지도 모르죠.
조선 후기 화폐사를 다룬 책은 기존에도 몇권 있기는 하지만 이 책도 상당히 재미있군요. 다만 가격 압박이..-- 정가가 무려 2만8천원. 책 값에 아까워 해서는 안된다고 늘 얘기는 하지만..^^ 전공서적이다보니 비쌀 수 밖에 없겠죠.
- 좋아요
- 6
- 댓글
- 0
- 작성일
- 2023.04.26
댓글 0

댓글이 없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