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문

팬더대왕
- 작성일
- 2015.5.29
나의 아버지 모택동 (하)
- 글쓴이
- 리민 저/김승일,양순창 공역
범우사
마오쩌둥은 공식적으로 네명의 부인과 결혼했고 10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물론 그는 평생 여자를 대단히 밝혔기에 알려지지 않은 사생사가 얼마나 될지는 아무도 모르며, 심지어 진의는 매우 의심스럽지만 마오쩌둥이 후계자로 지목했다가 덩샤오핑과의 권력다툼에서 패배한 화궈펑(華國鋒)조차 마오쩌둥의 사생아라는 "카더라" 설까지 있습니다.
마오쩌둥은 비록 신중국의 황제가 되었지만, 그의 가족과 자녀들은 그다지 행복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동생 마오쩌민은 성실하고 재정면에서 유능하여 형을 충실히 보필했지만 신강성에 파견되었다가 신강군벌 성스차이에게 체포되어 총살당합니다. 그의 아들 마오웬신은 마오쩌둥과 장칭의 사랑을 받으며 컸지만 우직했던 아버지와 달리 권력에 눈먼 자였습니다. 문혁 시기에 장칭의 수족이 되어 마오쩌둥이 죽은 뒤 쿠테타를 꾀하다가 화궈펑과 예젠잉에 의해 체포되어 17년 형을 받았고 1989년에 석방된 후 현재는 조용히 은거하고 있습니다.
마오쩌둥의 4명의 부인 역시 하나같이 불행했는데 첫번째 부인인 뤄씨후이는 아버지가 강제로 맺어줬다는 이유로 마오쩌둥에게 거부당하여 변변한 결혼 생활도 해보지 못한 채 21살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두번째 부인 양카이후이는 마오쩌둥이 허쯔전과 결혼하면서 이혼당하여 몇년 뒤 정부군에게 체포되어 참수당했습니다. 세번째 부인 허쯔전은 마오쩌둥이 징강산에서 게릴라 투쟁을 할 때부터 함께했던 혁명 동지였습니다. 강인하면서도 우직한 그녀는 남편에게 매우 충실한 아내였지만 마오쩌둥에게 버림받아 소련으로 보내졌고 마오쩌둥은 상하이의 3류 여배우였던 장칭과 결혼합니다. 권력에 대한 집착이 매우 컸던 네번째 부인 장칭은 마오쩌둥의 묵인 아래 온갖 전횡을 일삼다가 1976년 마오쩌둥이 죽은 뒤 한달만에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가택 종신연금으로 바뀌어 호사스럽게 살았으나 극심한 우울증으로 결국 1991년 자신의 집에서 자살했습니다.
마오쩌둥의 첫째 아들 마오안잉은 생전에도 마오쩌둥에 대한 우상 숭배를 비판하면서 아버지와 갈등을 빚었고 한국전쟁에 참전한 뒤 얼마되지 않아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했습니다. 둘째 아들 마오안칭은 극심한 정신 분열증 환자였기에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습니다. 셋째 아들 마오안롱은 4살 때 실종되었습니다. 마오쩌둥은 허쯔전과 결혼하여 6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리민을 제외하고 5명은 요절하거나 행방불명되었습니다.
즉, 열명에 달하는 마오쩌둥의 자녀들 중에서 그나마 장수한 사람은 마오안칭과 리민, 장칭이 낳은 막내딸 리너 세사람 뿐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삶 또한 결코 평온하지 못했으며 평생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마오쩌둥은 평생 중국의 낡은 봉건 사상을 때려부셔야 한다고 외쳤던 사람이지만 정작 자신은 전형적인 중국 봉건 남성이었습니다. 평생 모순적인 인생을 살았던 그는 오직 자신과 자신의 삶만 중시했고 그 댓가는 고스란히 가족들이 치루어야 했습니다.
또한 그의 불우한 가족사는 중국인들의 동정심을 유발하여 우상화의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마오쩌둥이 저지른 온갖 실정은 이미 중국 사회에 익히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가 대다수 중국인들에게 "우상"인 이유는 혁명에 자신의 가족을 바쳤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입니다. 사실 냉철하게 따진다면 마오쩌둥의 무심함과 바람끼가 유발한 결과일 뿐이지만, 전통 중국 사회에서 영웅이 대의를 위해 가족을 돌보지 않는다는 것은 무심함이 아니라 의협심으로 비추어집니다. 유비가 장판교에서 조조의 추격을 피해 가족들을 버리고 혼자 도망간 것이나, 유방의 가족들을 포로로 잡은 항우가 삶아 죽인다고 하자 유방은 "그 국물을 나도 맛보게 해달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도덕적인 비난 대신 오히려 그 기개를 높이 평가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나의 아버지 모택동(원저 : 我的父親毛澤東)》는 그의 딸 리민이 노년에 회고한 "한 사람의 인간" 마오쩌둥에 대한 책입니다. 마오쩌둥은 자신의 측근으로 두었던 두 아들(마오안잉, 마오안칭)과는 달리 딸들에 대해서는 권력에 접근시키지 않고 평범한 삶을 살도록 했으며, 자신의 성인 마오도 주지 않았습니다. 리민은 9살이 되어서야 자신이 마오쩌둥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12살에야 아버지를 만나 중국 지도자들의 저택이 있던 베이징 중난하이에서 14년동안 아버지와 함께 살았습니다. 조카인 마오신위(마오안칭의 아들)가 인민해방군 소장으로 대표적인 훙얼다이(紅二代, 공산당 고위 자제를 가리키는 말)로 특권을 누리는 반면, 리민과 리너는 일개 양민으로 평범하게 살고 있습니다.
▲ 리민(당시 14살)과 마오쩌둥. 마오쩌둥이 43살에 낳은 리민은 마오쩌둥의 바람기로 허쯔진과 이혼하면서 소련으로 보내져 어린 시절을 매우 불우하게 지내야 했습니다. 그나마 성인이 되어서 평안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죠. 그녀의 딸 쿵둥메이는 재벌과 결혼하여 중국에서도 손꼽히는 부자입니다.
리민의 회고록에서 마오쩌둥은 인민의 고충을 두루 살폈던 위대한 지도자이면서 자신에게는 자상하면서 엄격한 아버지입니다. 적어도 그녀의 기억에는 그렇게 남아 있다는 것이겠지요. 노년의 마오쩌둥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딸의 시각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과 형제 관계,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서술합니다.
하지만 대약진운동과 류사오치 숙청, 문혁과 같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부분은 쏙 빼놓거나 두리뭉실하게 넘어가면서 아버지의 고충을 인간적으로 묘사합니다. 마오쩌둥은 10억 민중의 지도자에 걸맞지 않게 매우 검소했으며 자신에게 어떤 특권도 허용하지 않았다는 점, 자신은 여느 인민과 다를 바 없이 평범하게 살았다는 식입니다. 대신, 계모 장칭에 대해서는 극심한 불쾌감을 드러내며 마오쩌둥의 딸인 자신도 문혁 시절에 온갖 핍박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혁명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은 장칭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마오쩌둥이 있었기 때문이며 장칭은 전적으로 마오쩌둥의 허락 아래 그의 전위대로서 행동하였습니다. 리민은 딸의 입장에서 교활한 장칭이 현명한 아버지의 눈을 흐리게 만들었다고 말하지만 어불성설이죠. 그녀의 회고는 도대체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싶기도 합니다.
흔히 중국 정부나 마오쩌둥 숭배자들이 선전하듯, 마오쩌둥이 과연 실제로 엄격한 청교도적인 삶을 살았는가에 대해서는 수많은 이견이 있습니다. 그가 자기 업무에 매우 열성적이고 성실했지만 신중하지 않고 즉흥적이었습니다. 장제스가 타인에 대한 극도의 불신감을 드러내며 사소한 것까지 일일이 챙기려다 되려 역효과가 난 케이스이라면, 마오쩌둥은 혁명 정신을 장황하게 떠든 다음 세부적인 것은 남에게 맡기고 앉아서 결과를 보고받는 타입이었습니다. 하지만 린뱌오는 그에 대해 "잘되면 모두 자기 덕분이고 안되면 남에게 책임을 돌린다. 같이 일하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평하였습니다. 마오쩌둥은 수시로 간부들에게 자아비판서, 즉 반성문을 써서 제출토록 하여 자신의 승인을 직접 받도록 했습니다.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몇번이고 다시 쓰도록 하였습니다. 이는 당사자에게 공개적인 수치심을 주어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을 철저하게 차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가 매우 검소한 식단을 고수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한끼에 100가지 종류가 넘는 사치스러운 음식을 즐겼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여색을 밝히고 사생활이 매우 문란했다는 점에는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겁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가 적어도 축재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여느 독재자들처럼 스위스 은행에 비밀계좌를 만들지도 거액의 유산을 자녀들에게 남겨주지도 않았습니다. 다른 간부들과 달리, 미국 영화나 미제 제품을 몰래 즐기지도 않았고 고가의 옷 대신 평생 낡은 인민복만 입었습니다. 그의 일생은 이분법적으로 옳다, 그르다라고 정의하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모순적입니다.
이 책은 장징궈의 회고록 《나의 아버지 장개석》과도 묘하게 비교가 됩니다. 두 사람 모두 20세기 중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을 아버지로 두었고 두 사람은 숙적으로 중국의 지배자 자리를 놓고 싸웠습니다. 마오쩌둥과 마찬가지로 장제스도 평가가 극과 극을 달리고 공과가 분명한 사람입니다. 장징궈의 회고록에서 등장하는 장제스 역시 주로 인간적인 면을 강조합니다. 대신 국공내전 말기의 급박했던 정치적 상황에 대한 묘사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것은 장징궈가 장제스의 아들이기 앞서 국가 지도자였고 리민은 평범한 일반 여성이라는 차이 때문이겠지요. 장남 마오안잉이 죽지 않고 장수하여 회고록을 썼다면 또 달랐겠지요.
만약 마오안잉이 살아 있었다면 중국의 역사는 또 어떻게 바뀌었을지, 장징궈처럼 2대 세습을 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노년에 극도의 편집증에 시달리던 마오쩌둥은 흐루시초프가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였듯, 자신이 죽은 뒤 저우언라이나 덩샤오핑 등 쟁쟁한 원로들에 의해 자신이 이룩한 모든 것을 부정당할까 매우 두려워했습니다. 장칭을 비롯한 4인방은 자신에게 충실하지만 이들은 적이 너무 많고 스스로의 역량이 아닌, 오직 마오쩌둥이 있기에 권력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비교적 온화한 성격인 화궈펑에게 후세를 부탁했습니다. 마오쩌둥의 예상과 달리, 덩샤오핑은 천이, 예젠잉 등 군 원로들의 지원을 받아 화궈펑을 몰아내고 권력투쟁에 승리했지만 덩샤오핑은 흐루시초프가 되는 대신 과거를 잊고 타협하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덕분에 마오쩌둥은 지금까지도 중국의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 2013년 마오쩌둥 탄생 12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리민. 이제 그녀도 78살의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마오쩌둥은 더 이상 중국에서 신성불가침의 존재는 아닙니다. 그를 공개석상에서 비판한다고 해서 북한처럼 신성모독이라고 체포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톈안먼 광장에는 여전히 그의 거대한 사진이 걸려 있으며 대다수 중국인들은 그를 숭배합니다. 그가 저지른 과오는 "사람이 아니라 시대가 만들어낸 아픔" 쯤으로 치부됩니다. 이는 수십년간 선전과 세뇌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원래 인간이란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이 평생토록 믿어온 바를 쉽사리 바꾸지 않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상처는 금새 잊어버리고 좋았던 기억만 남습니다. 그리고 정치 세력들은 이를 정치적인 수단으로 악용합니다. 바로 이 점이 역사의 반성이 어려운 이유입니다.
이는 중국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도 다를 바 없습니다. 박정희 향수나 노무현 향수가 꾸준히 먹히는 것도 인간의 감성을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이 책 역시 마찬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 마오쩌둥을 알기 위해 읽어보기를 권합니다.
- 좋아요
- 6
- 댓글
- 0
- 작성일
- 2023.04.26
댓글 0
댓글이 없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