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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정공식계정
- 작성일
- 2020.1.25
굿바이, 마치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 글쓴이
- 노태맹 저
한티재
1. 얼마 전 기형도 문학관에 다녀왔다. 광명시 소하동의 한 실업계(요즘은 특성화고라고 하지만 요설일 뿐인 것 같아서) 고등학교에서 버티는 것으로 소임을 다했다 여길 정도로 엉망인 강의를 마치고 말이다.
지금은 광명시 소하동이지만 여전히 이곳 사람들은 '소하리'라 부를 것이다. 오래도록 시흥 소재였고, 시흥은 지금 내가 사는 남양주와 서로 가장 끝이다. 조금만 걸어나가면 포구가 있었던 곳이고 갯벌을 메워 간척지로 논밭을 만든 곳이다.
광명에서 나는 짧게 살았다. 2000년에 엄마가 떠나고 이듬해 광명6동으로 이사를 나왔다 아무 연고도 없는 이곳으로 오게 된 건 작은언니 신혼집이 광명 하안동이었기 때문이다. 2001년 늦봄부터 몇 달 살고 난 뒤 결혼을 해서 이곳을 떠났다. 경륜장이 들어서기 전 낮은 연립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던 낡고도 오래된 동네였다.
딱 한 번, 기형도의 생가를 찾아가 보려던 때가 있었다. 근처 소하리에서 오래도록 살았다던데 지도를 펼쳐보니 집에서 정말 멀지 않은 곳이긴 했다. 지금처럼 네비게이션이 있었다면 한 번은 찾아가 볼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집에서 엄마 기제사 한 번, 할아버지, 할머니 제사 두 번, 그리고 추석 명절까지 치르고 떠나왔다. 무언가 내게 가장 익숙한 음식이라면 제수마련 같은 것들. 죽은 자들을 위해 차리는 밥상은 살아있는 자들의 밥상을 차리는 일보다 쉬운 일이다. 그들은 먹는 입이 없는 검은 입들 뿐이므로.
광명은 기형도가 죽기 전까지 살았던 동네. 그 시만큼이나 음습한 곳이었고, 재개발을 둘러싸고 팽팽하게 폭력적인 곳이었다. 비평준화 지역의 입시는 중학교 때부터 광풍이었으며, 교복이 곧 모욕이었던 곳.
아버지는 그때 조선일보 신문지국에서 일을 하며 주말에만 들어왔고, 산림조합에 근무했던 오빠는 인천 옹진으로 출장을 자주 들어가야 해서 집에 들어오지 못할 때가 많았다. 긴 골목 끝에 자리 잡은 집에서 혼자 '어둡고 무서워' 애써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광명집까지 걸어들어가는 그 긴 골목은 빨려 들어가는 입속이었고 내 어깨에는 악착같은 검은 잎이 들러붙어 있었다.
3. '광명역세권휴먼시아단지'라는 다소 경박스러운 이름을 달고 있는 아파트 단지들을 지나, 기아자동차 공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남자들과 뒤섞여 마을버스를 타고 석수역까지 나왔다.
잠시 살았던 광명 6동은 휘황한 아파트단지로 변해서 그 집터도 찾기 힘들어졌다. 재개발 과정에서 딱지를 하나 거머쥔 오빠 내외는 철거싸움에 휘말려 한동안 친정은 들썩댔고, 결국에는 작은 승리랄지 기반이랄지. 그곳을 발판 삼아 아파트 평수를 조금씩 늘려나갔다.
광명을 생각하면 기형도가 늘 떠올랐고 한때는 그의 시를 통해 죽음에 몰입을 했던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아버지 무릎 위에 앉아 밥을 먹곤 했던 절대사랑의 염력과 무언가 옅은 책임감이 남았다. 그 책임감이란 것은 생에 대한 책임감이었다기보다는, 뭐랄까 생 혹은 죽음에 대한 자격을 획득하지 못했다는 일종의 자격지심이었다. 막내로 살면서 내가 감당할 필요가 없었던, 유순한 '유년의 윗목'이 끝내 나를 살게 했다.
4. '죽어가는 자들은 치워지고 격리되어 살아 움직이는 이들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나는 그저 그들의 외마디 소리, 눈물, 아들 부르는 소리, 눈물, 멍한 눈길만을 지키는 고독의 감시자다. 그리고 이윽고 그들은 사라진다. - 죽어가는 자의 고독 中(51)'.
자칭 '고독의 감시자' 노인요양병원 원장 노태맹 시인은 10여년 동안 700여명의 의학적 죽음을 선언했다고 적고 있다. <굿바이 마치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은 노태맹 시인이 다시 쓰는 사망진단서 같기도 하다. 그 어떤 죽음도 단수로 오지 않으니까. 너무나 많은 생들을 끌어들이며 살지 않나. 기혼에 자식들도 여럿이라면 더더욱. 가족이자 친인척이었고 친구이자 이웃이었던 '한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기록으로 나는 읽었다.
요양병원이란 곳에 살러 들어가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결국 죽으러 들어가는 자리일 테고, 아버지의 마지막도 결국 이런 요양병원에서 맞이하게 되는 것일까, 살짝 아버지의 죽음을 대입해 보았다. 죽음을 생각하는 일은 늘 불경스러운 일이기는 하다. 엄마 죽음 이전에 가장 가까웠던 죽음은 중학교 1학년 때 할머니의 장례였다. 아들도 많고 며느리도 많고 손주들도 많았던 할머니. 각 집안에 큰언니들까지만 입힌 그 하얀 상복이 입어보고 싶었다.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상상이었는데 그 불경함에 대한 무거운 마음을 꽤 오래도록 이고 살았다.
나는 잘 알고 있다. 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사람의 숨은 그렇게 한순간에 끊기지 않고 마지막에 얼마나 많은 애를 쓰는지, 온 생을 걸고 숨을 쉬려고 애를 쓰는지 말이다. 감기지 않는 눈을 얼마나 한참 덮고 있어야 하는지를 말이다.
안방 아랫목에서 모든 숨을 몰아쉬는 할아버지의 임종으로부터 어린 우리들을 격리시켰고, 아버지도 엄마도 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충격을 받았던 그때가 네 살이었다. 생의 첫 기억, 첫욕망 모두 죽음과 가까웠다는 것이 살면서 내내 불길하였고 불경하였다.
5. '생명/죽음에 대한 권리. 그러나 시골에서 노동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온 노인들에게 죽음은 너무 두렵고 무거운 것이다. 살려 달라고 나의 손과 의사 가운을 잡아 끄는 노인들에게 죽음에 대한 권리를 어떻게 주장하라고 말해야 하는가? 어쩌면 그들은 생명에 대한 권리조차도 제대로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 존엄하게 죽을 권리 中(61)'
요즘 아픈 언니와 오히려 죽는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나눈다. 엄마는 '손 쓰기가 힘든 상태'였고 그때 병원치료를 포기했던 일에 대해서도 직면하는 동시에 면직免職도 하자고 말이다. 20여 년 전 공공의료보험은 엉망이었고, 원발암을 찾아내는 일이 의미 없을 정도로 주요 장기에 퍼져있어 손 쓸 수 없었다고, 어쩌다 병원진단서를 들고 뛰어다녔던 나는 그 증거자가 되어 좀더 격하게 엄마의 상태를 열악하게 만드는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지금은 아닐 수도 있으나 그때는 맞는 선택이었다고 말이다.
그렇지만 모두 다 속내를 꺼내놓지는 않는다. 각자 돌아서서 의심하고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정말 그랬을까,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가 완화치료라도 열심히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훨씬 더 큰 고통 속에 보내드린 것은 아닐까. 가족의 이름으로 한 사람의 생명권 혹은 죽음권을 쥐고 흔들 권리가 존재할 수 있을까. 그 생각까지 미치면 나도 미칠 지경이 되곤 했다. 엄마의 죽음의 방식을 결정한 사람은 바로 나였으니까.
2002년 젖먹이 아이를 업고 춥고 밤이 길었던 토론토에서 집요하게 글을 썼다. 끝내 솔직할 수 없던 글이었다. 엄마에 대해서 썼으나 결국 엄마를 잃은 내가 불쌍해 견딜 수 없었던 글이다.
살고 싶었을, 그 누구보다 막막한 마음을 감추고 외롭고 무섭게 죽음을 견뎠던 엄마의 마지막을 나는 적을 수 있을까.
-이어서
6. 혼란이었을지 슬픔이었을지. 혼란한 슬픔 정도라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 같다.
청소년도 아닌 그렇다고 어른도 아닌 그 사이 어디쯤일 때, 엄마는 떠났고 형제들 제각각 견디느라 진이 빠지던 시기였다. 모든 것이 의미였고 모든 것이 무의미였다.
밖에서 노는 밥과 술이 맛있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부모에 대해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았고 묻지 않았으므로 그 여인은 내게 영원히 미스테리로 남았다. 아무것도 모르겠는 인생의 비밀만을 남겨둔 채.
딱 한 번 어리광을 부린 적이 있었다. 마석 집 앞 개울에 편지를 딱 한 번 수성 펜으로 편지를 써서 종이배로 접어 띄웠다. 비가 많이 쏟아지던 여름이었다. 멀리 가지 못하고 이내 흐물대다 ‘젖은 편지’는 장맛비에 흘러 멀리 떠났다. 그리고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 시를 한 편 쓰고 더 이상 문학 따위에 마음을 주지 않기로 했다.
종이배
당신 보낼 때
물로 띄운 기억 없는데
찾아 나서는 방법은
왜 물로만 남는지요
한 뼘 가닿지도 못하고
퉁퉁 불어터진 밥풀때기의 말들.
7. ' 그러나 사람들은 너무 쉽게 이야기한다. "사람들이 나는 내가 죽는다는 것을 안다 "고 말하는 것은 경험적 판단이라기보다는 그저 선험적 판단일 뿐이다. 나는 죽음을 경험해보지 못했고, 판단은 결코 내 사지를 절단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나는 내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일 자신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지성의 추론일 뿐이다. 추론은 결코 내 머리를 박살내지 않는다. 어느 누가 존재하지 않음이라는 무지막지한 폭력 앞에서 그렇게 쉽게 말을 내뱉는가. 가벼움, 두려움, 책을 덮고 병실로 올라간다. 어쩌면 죽음을 머리로만 받아들이면서 우리는 현실적 폭력에 순응하는 것인지 모른다. 폭력에 의해 죽어간 사람들의 죽음을 머리로만 가볍게 받아들인다. 입으로만 경전을 읽고 있는 것과 같다. ' -굿바이 마치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중.
'느닷없다'.
죽음을 아우르는 말 중에서 이 말만큼 마음을 후비는 말을 아직 나는 찾지 못했다. 짧은 투병(본인은 많이 고통스러우셨겠지만) 과정에서도 두려움과 기대감이 뒤섞인 눈망울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때 차라리, 정말 차라리 '느닷없이' , 예를 들어 교통사고처럼 떠난다면 본인은 덜 두렵고 덜 괴롭지 않을까, 라는 경박한 생각도 했었다.
하루하루 죽음으로 다가가는 고통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모든 인간은 죽음을 향해 간다는 경전 속에서나 접하는 말들이 죽음에 관한 그 무엇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누구나 죽지만 죽어서는 안 되는 '우리 엄마'가 죽었습니다.
이것만이 실체적 진실이었을 뿐이다.
'결정적으로 20대에 맞이한 어머니의 죽음이 지금의 길을 만들었다. 어머니는 이중 질곡에 놓인 삶을 살았다. 세계화된 농업체제 속에서 한국 농민인 동시에 가부장체제의 여성/농민이었다는 점이다. 나의 어머니는 ‘정은정’ 개인의 어머니인 단수이기도 했지만 ‘어머니들’인 복수의 존재이기도 했다. 내게 처음부터 거창한 사회학적 고민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내 주변만 해도 어머니를 비롯해 숙모, 이모들이 ‘여성농민’의 이름으로, 하필이면 ‘한국에’ 살아가고 있었고 나는 오래도록 그/녀들의 삶을 지켜봐왔고 기록의 의무감을 지기로 했다.(...)
내 어머니의 죽음은 개인의 죽음인가, 아니면 사회적 죽음인가. 이 질문을 상중(喪中)에 끊임없이 던졌다. 그래서 모든 사적인 것은 사회적인 것이고, 모든 개인의 죽음은 역사의 흐름 속에 있다는 사회학의 정언에 가 닿는 계기가 그렇게 느닷없이 왔다'
-<질적연구자 좌충우돌기> , 한울(2018) 중에서
'느닷없이' 살아왔다. 그리도 단 한 번도 내 생에서 죽음을 떨쳐내지 못하고 살았다. 엄마가 떠나고, 이듬해부터 이모와 외삼촌이 비슷한 병으로 돌아가셨다. 언니가 젊은 나이에 암이란 병을 얻었다. 박사과정 입학 시험을 치르고 있던 그 시간에는 용산 참사가 났다. <대한민국치킨전>이란 책의 초고를 뽑고 있을 때는 '세월호'가 가라앉았다. 그리고 백남기 농민의 죽음을 따라다녔다. 그 기록이 막바지 탈고 작업을 하고 있을 때, 작은아버지가 느닷없이 세상을 버렸으며 그 임종을 지켜보았다.
식구가 많으니 맞닥뜨릴 죽음도 많은 것이라 여기면서도 내내 슬펐다. 대체로 의연했으며 울 때는 울었고 장례식에서 의전을 챙겨야 할 일 있으면 능숙하게 해내면서 나이가 들어왔다.
8.
젖은 편지를 읽다
자귀나무 붉은 그늘 아래
늙은 소 묶어놓고 연못가
내 둥글게 구부리고 잠들었네
거친 세월이 가고
커다란 바위 같은 천둥 내 잠 속으로 떨어져 갈라지고
자귀나무 검은 그늘 아래 문득 잠깨었을 때
연못은 여린 짐승처럼 온몸 뒤틀며
붉은 자귀꽃 뱉어내고 있었네
늙은 소 어디론가 사라지고
자귀나무 붉은 그늘 아래
내 누구의 사랑도 아니었을 때
내 손에 젖은 편지 들려 있었네
검게 번져 읽을 수 없는
버릴 수 없는 젖은 편지 들려 있었네
- 노태맹
마석집 개울가에서 엄마에게 띄워보낸 젖은 편지는 이 시 때문이었다. 수성펜으로 조곤조곤 적어내려갔다. 당신이 보고 싶고 떠난 당신을 원망하지 않겠다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비가 많이 내리는 날 '검게 번져 읽을 수 없'도록. 차마 간직할 수도 '버릴 수 없는 젖은 편지를 들'고 비를 맞으며 많이 울었다. 어린 아이가 엄마의 치마춤을 끝내 놓지 못하고 말이다.
비를 맞은 자귀나무 꽃의 향기를 그때 알았다. 잎을 떨구고 돌콩을 품는 자귀나무의 보드라운 솜털을 보면서 블러셔 화장 붓을 떠올리기도 했다. '코티분' 하나로 버텨온 생, 붉은 생기 하나 덧대지 못한 퍼석한 엄마의 생이, 그리고 그 생을 기억하는 나의 가난하고 불쌍한 기억이, 늘 젖은 편지처럼, 수챗 구멍으로 흘러가 건져 먹지도 못할 불어 터진 밥풀때기처럼, 비로소 사랑을 잃고 쓴다.
-끝
#굿바이마치오늘이마지막인것처럼, 노태맹 지음, 한티재(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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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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