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왕가위 감독이 1994년에 만든 영화 <동사서독 東邪西毒 / Ashes Of Time>은

기다리던 디뷔디는 안 나오고 블루레이 디스크('비디'라 불러야 하나?)가 나왔다.

그것도 <중경삼림> <타락천사> <화양연화> <2046> <해피 투게더>를 넣은  묶음으로.

왕가위 감독의 작품 가운데 빼어난 영화만 골라놓은 것이어서 망설일 까닭이 없었다.

 

가장 먼저 골라 본 영화는 <동사서독 리덕스>다.

이 영화를 집에 있는 비디오 테입으로 볼 때의 느낌으로 견줄 수는 없었다.

감독이 2008년에 다시 편집하여 올린 것이지만 줄거리는 옛날 영화와 다르지 않았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아서 같이 떠나지 않았다" "주는 돈을 헤아려보는 칼잡이는 오래 있지 않는다"

마시면 옛일을 다 잊는다는 술 '취생몽사'가 나오는 대목 따위는 나올 자리에 버티고 있었다.

누렇게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모래밭과 푸른 물결이 이는 바다, 나오는 이들이 헐렁하게 입은 옷 빛깔들이

몇 번 본 영화가 아니라 처음 보는 듯 눈과 가슴속으로 들어왔다.

 

<동사서독>에 대해서 2008년에 글을 썼는데, 벌써 일곱 해가 지나가 버려서 세월이 참 빠르다.

(http://blog.yes24.com/blog/blogMain.aspx?blogid=baehongg&artseqno=881167)

내 머리속에서는 엊그제 쓴 듯한데...

 

그 때나 이제나 이 영화를 다 알았다고는 할 수가 없다. 다시 봐도 알쏭달쏭한 구석이 더러 있다.

사람 사이의 사랑이 쉽지가 않듯이, 영화 속에서 감독이 그려내는 사랑과 사람살이도 속을 알기 어렵다.

"가질 수는 없어도 잊지는 말자"며 어쩔 수 없이 형의 아내가 되어버린 사람 자애인(장만옥)이 말할 때,

사랑하는 사람이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을까? 가슴이 타들어 가는데 그런 말이 머리에 들어올까 싶다.

그래도 오래된 영화를 다시 손을 봐서 세월의 때를 지우고 깨끗하게 다듬어놓은 영화여서 보기에 좋았다.

 

2.

이 영화의 바탕은 홍콩에서 글을 썼던 김용의 무협소설 <소설 영웅문 / 사조삼부곡>이다.

곽정과 황용이 나오는 1편인 <사조영웅전>, 양과와 소용녀의 안타까운 사랑을 담은 2편 <신조협려>,

장무기와 조민이 나와 칼 두 자루를 줄거리로 삼은 3편 <의천도룡기>에 나오는 이들이 이 영화에 나온다.

소설에서 가장 잘 싸우는 천하오절로 동사(황약사), 서독(구양봉), 남제(단지흥), 북개(홍칠공), 중신통

(왕중양)을 꼽았는데, 이들 가운데 동사와 서독, 북개가 이 영화에 나왔다.

 

소설과 영화를 맞춰보면, 감독의 각색 솜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름과 큰 테두리만 따왔을 뿐, 나머지 이야기들은 감독이 모두 꾸며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앞뒤는 맞게 해놓아서 얼른 보면 마치 소설을 그대로 옮긴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 보면 딴판이다. 그래서 더 놀랍다.

 

영화 속에서 사막에서 주막집을 꾸려가면서 때때로 사람을 죽이도록 다리를 놓아주는 구양봉(장국영)은,

소설에서는 가장 나쁜 놈으로 나온다. 온갖 나쁜 짓을 다하면서도 싸움은 잘 해서 쉽게 죽지도 않는다.

소설에서 가장 나쁜 놈이 영화에서는 가장 멋있게, 사랑의 아픔을 혼자 겪는 양 나온다.

 

소설에서 구양봉과 늘 싸웠던 황약사(류가휘)는 영화에서 어느듯 가까운 벗이 되어 있다. 

영 딴판인 짝을 지운 영화를 보면서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소설에서 사람 이름만 빌려왔을 뿐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하는 마음이 들었다.

 

혼자 다니며 칼싸움을 잘 하는 이로 나오던 홍칠(장학우)은 나중에는 따라온 아내와 같이 다니게 된다.

소설에서는 홍칠공으로 나오고, 거지대장이다.

온 나라를 떠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빌어먹던 거지한테 아내가 있었을까?

홍칠공이 소설에서는 먹을 것을 멀리 하려고 제 손 가락 하나를 자른 것으로 나오는데, 영화에서는 죽은

아우를 위해 앙갚음 하려던 아가씨(양채니)의 부탁을 받아 싸우다가 손가락을 잃은 것으로 나온다.

 

소설의 2편인 <신조협려>에 나오는 독고구패가 쓰는 검법인 독고구검이, 영화 속에서는 오누이 모용연과

모용언(임청하)이 황약사의 사랑을 얻지 못하자 외딴 곳으로 혼자 떠나서 놀라운 검법을 만들어냈다는 것.

 

3.

그런데 영화에서 우리말로 새로 옮긴이는 아마도 이 무협소설은 읽지 않은 듯했다.

<동사서독>을 우리말로 옮기면서 그 바탕글인 <소설 영웅문>도 읽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홍칠이 아내와 북쪽으로 떠난 뒤의 일을 옮기면서, 나중에 북쪽의 '마적대의 두목'이 되었다고 옮겼다.

영화에 나오는 한자도 소설과 같이 '북개'라 써있고 '개방 방주'가 되었다고 나오는데, 옮긴이는 무슨

뜻인지 몰랐나 보다. 거지 무리들이 만든 것이 '개방'(무협소설에 나오는 구파일방의 하나)이고

여기에서 우두머리가 되었다는 얘긴데, 난데없이 마적이 되고 그 우두머리가 되었다니...참 웃긴다.

 

동사 황약사 이야기도 잘못 옮겼다.

나중에 황약사가 동해 도화도에 들어가 섬임자가 되어 지냈다고 한자로 나와 있고,

소설 1편 <사조영웅전>에서도 도화도주로 나온다. 그런데 옮긴이는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옮겼다.

영화에서 서독 구양봉의 고향 백타산에 복숭아꽃이 피고 그게 그립다는 이야기가 나온데다,

동사 황약사가 자애인을 만나러 백타산에 갔으며 '도화도'가 복숭아꽃섬이어서 헷갈렸을까? 웬 고향?

 

옛날에 볼 때는 몰랐는데, 왕가위 감독이 주역을 좋아하는 듯했다.

소설에는 그날 일진에 대해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몇 번 나온다.

일부러 그렇게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홍칠과 엮인 꼭지에서만 나왔다.

홍칠이 떠날 때 "오늘은 북쪽이 길하다"느니,

"나한테는 7이 좋지 않는데, 홍칠이 왔을 때 내 일을 끝내게 된다"느니,

"비가 내려 북쪽에 살기가 있다"면서 주역의 괘를 풀어놓은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4.

영화 속에서 누워있는 구양봉의 몸을 더듬으며 황약사를 느끼는 모용언의 모습이나,

모용언의 손길을 백타산에 있는 자애인의 손길로 받아들이는 구양봉의 모습은

글로는 나타내기 어려운, 다시 봐도 안타깝지만 잘 찍은 대목이었다.

 

새가 갇혀있는 조롱이 돌아가거나 그 옆을 오가며 구양봉과 모용언이 입씨름을 하는 꼭지나,

칼싸움을 할 때 언제나 빠르게 나아가지만 천천히 돌아가는 듯 느리게 보여주는 대목도 남다른 영화였다. 

 

아쉬운 것은 이렇게 새로 만든 묶음이라면, 왕가위 감독과 영화에 나온 배우들이 나와서 영화를 찍을 때나

그 뒷이야기들을 엮은 덤이 있어야 할 텐데, 여섯 편의 영화 어느 하나에도 없다. 그냥 예고편만 하나씩

있을 뿐...작은 책자 하나가 왕가위 감독의 영화에 대해 말해주고 있는데, 많이 아쉽다.

 

이 묶음은 124,200원이다. 하나씩 낱개로 사면 28,700원이니까 6개 영화는 모두 해서 172,200원이 되는데,

묶음으로 사면 48,000원이 싼 셈이다. 다른 아쉬움을 돈으로 달래야 할까?

아쉬운 구석도 더러 있는 블루레이 모음지만, 다시 들어가면 언제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바로 사고 말았다.

고이 간직하면서 내게는 두고두고 볼 영화들이다. 묶음 가운데서 다음에는 어떤 영화를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