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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짱이
- 작성일
- 2021.11.30
가출생활자와 독립불능자의 동거 라이프
- 글쓴이
- 권혁란 저
그래도봄
3남 3녀 중 장남 아버지와 3남 3녀 중 장녀인 엄마 사이에 막내 그러니까 위로 오빠 그 아래가 나. 할머니가 살아 계신 그 시절에 난 여자가 목소리 크다고 혼나, 좋아하는 반찬 골라 먹는다고 혼나, 누가 선물로 사 온 과일이 있으면 제일 크고 맛나게 생긴 거 들고 튄다고 혼나 이래저래 구박덩이였다. 다행인 건지 할머니 덕에 천덕꾸러기였던 나를 우리 아부지 어무니는 불쌍히 여겼다. 그래도 뭐 여자는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한다는... 어려서는 야무지게 집안일을 도왔다. 일하는 엄마를 대신해 청소는 물론 밥에 밑반찬 재료 다듬기까지 제법 잘했다. 그리고 사춘기를 타고 나를 파업 선언을 했다. 같은 자식인데 왜 오빠는 안 하고 나만 하느냐에 대한 불만 표출이 시작이었다. 딸 둘만 있는 이모는 나중에 결혼하면 평생 하고 사니까 손 하나 까딱 안 시킨다던 디 울 어무니는 나중에 결혼해서 못하면 엄마 욕 먹이는 일이라며 이것저것 가르치려 했다. 그때의 내가 그랬지 "걱정 마. 설사 결혼을 한다 해도 그런 거 잘 하는 사람 만나서 얻어먹으며 살 테니까." 그리고 나는 청개구리처럼 이리저리 내뺐다. 나는 그런 가정환경을 짊어지고 살아온 불혹 3년 차다.
페미니스트 저널에서 일하며 많은 글을 쓰고 책을 만들었다는 딸 경력 50년 차 두 딸 엄마 경력 30년 차인 작가님은 본인의 경험에서 오는 감정을 담담히 그려낸다. 본인의 경험을 풀어내는 이야기는 날카롭지만 공격적이지 않다. 대한민국의 모든 남성 여성이 각자의 자리에서 느끼는 부당함을 쏟아내기에는 한도 끝도 없겠지만 나와 비슷한 순간을 살았구나에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여자이고 엄마이기에 경험되는 이야기는 나에게는 공감과 위로였다.
막내딸로 태어나 차남과 결혼하고 딸 둘을 낳은 며느리. 연애 시절 밥도 사주고 백화점에 데려가 쇼핑도 시켜주고 책도 선물해 주시던 시어머니는 딸 둘은 낳은 며느리에게 "네 사주에는 자식이 없다"라는 말을 던진다. 그 말의 상처가 아물기까지 꽤 오랜 시간을 버텼으리라. 자칭 페미니스트로 명절마다 제사마다 결국은 남의 집 사람인 며느리만 고생하고 그 집 사람들인 아들들이 쉬는 것이 못마땅했지만 감내했다. 그런 그녀가 친청 엄마의 제사상을 차리며 뜻하지 않는 감동과 행복을 느낀다. 이별의 슬픔 그리고 그리움에서 나오는 애틋함을 엄마의 제사상을 차리며 느꼈다. 결국은 그 의식이 싫은 게 아니라 의식을 표현하는 형식이 싫었으리라. 90년 대생이자 여자이며 독립할 생각이 없는 딸들이 살아갈 날들과 자꾸만 독립을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돌아온 엄마가 살아온 날들 사이에 많은 변화가 있지만 점점 무서워지는 세상에서 오직 딸들의 안전을 기도한다.
나는 게으른 사람이다. 고로 부당함을 느꼈을 때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 그저 꿍얼거리며 불평을 늘어놓을 뿐. 다만 그 벽이 내가 쳐도 감당이 되겠다 싶을 때는 그냥 한번 던져 본다.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다. 모든 사람이 다 같이 느낄 수는 없지만 나는 아들이 아닌 딸이었기에 그리고 여학생이었기에 마지막으로 며느리이기에 그 자리에서 느껴지는 것들에 대해서 아부지 그리고 어무니에게 그리고 (학생 시절은 암흑기니 패스) 시부모님이 돌아가셨지만 때때로 느껴지는 아들과 며느리 사이의 편차를 남의 편에게 대놓고 말하는 편이다. 즉, 사회 개선이 목적이 아니라 나 편하자고 하는 내 안위가 목적인 여자 사람인 걸로.
나는 딸 40년, 그리고 아들 둘 엄마 9년 차이다. 부모는 이 세상의 시련과 어려움으로부터 아이들은 보호하고자 한다. 조금은 지나친 감이 있지만 아들 둘, 그러니까 잠정적인 폭력가해자의 엄마로서 생각이 많아진다. 여자로서 딸로서 내가 느꼈던 그 시절과 내 아들들이 살아갈 시절에 여자 그리고 남자의 의견은 과거보다 지금 그리고 다가올 시절에 더 공격적일 것이다. 고리타분하다 하겠지만 서로 어우러져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를 꿈꾸지만 아이들에게 바르고 곧은 마음을 어떻게 심어줄지 모르는 무식한 엄마일 뿐. 그런데 책을 읽다 보니 부모이기에 모든 것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부모와 자식은 같이 살아가면서 서로에게 상처받고 위로하며 그렇게 같이 커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어쩌면 뭘 알아서가 아니라, 뭘 몰라서 그랬을 것이다. 뭔가를 알았다면 그럴 수 있었을까? 용감해서가 아니라, 겁이 없어서가 아니라 어쩌면 선택할 게 그것밖에 없어서였을 것이다. 그 나이에 나는 씻은 듯이 가난했고 작은 방에 혼자 살았다. 5년 만에 졸업하고 교수 추천장까지 들고 갔지만 취직한 곳은 하는 일도 보수도 변변찮았다. 결혼한 것은 큰 뜻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부끄럽게도 내 입을 벌어 먹여 살릴 능력이 없었던 거였고 생전 처음 몸을 섞은 남자가 먹여 살리겠다고 했던 말이 청혼이었다. 여러모로 무지했던 그때 같이 잔 남자와 결혼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았다. 좋아한 사람이니 결혼 안 할 이유나 조건은 하나도 없었고 결혼할 이유와 상황은 맞아떨어졌다. 귀한 딸이라며 부모가 보살펴주는 것도 아니라서 반대를 하거나 허락을 받을 사람도 없었다. 결혼 선택은 오로지 나의 몫이었다.
p21
'남자는 여자가 자신을 무시할까 두려워하지만 여자는 남자가 자신을 죽일까 두려워한다'라는 말은 옛날 남존여비를 부르짖어 민망했던 시절부터 2021년 현재까지 관통하는 기막힌 진실이다.
p192
이제 페미니스트라는 것이 따로 있을 필요가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그저 자기 삶을 살고 있는 중인 현재의 평범한 여자들이, 자기 일을 이야기하는 현재 자체가 페미니즘 한복판이었다.
p214
#가출생활자와독립불능자의동거라이프 #권혁란 #그래도봄 #에세이 #리뷰어스클럽
**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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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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