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

하루
- 작성일
- 2011.1.20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
- 글쓴이
- 이덕일 저
김영사
강진 다산초당을 찾아간 때는 6년전 일이다.지척에 두고도 마음만 있었지 실천하기는 참말 어려운 일이 바로 메어있는 삶을 두고 마음먹은 곳에 직접 간다는 것이다.
언제 다시 가보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인지라 급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다산 정약용선생의 마지막 유배지였던 그곳은 울퉁불퉁 바위가 불거져 나온 산자락 어딘가였는데 비가 온 뒤라 땅이 질척이고 경사가 급해서 오르락내리락하기 참 힘든 지경이었다. 걸어 올라가며 나누었던 얘기가 있었는데, 그렇지! 나라를 걱정하고 시대를 아파하며 새 시대를 구상하던 한 인간을 어차피 죽이지 못하고 죽음이상으로 뭉갤려면 좀 더 험악하고 그 방법이 졸렬황당해야하지 않겠는가 하는 말을 주고 받았던 기억이 난다.
워낙에 널리 알려진 역사서라 많은 서평들을 접하면서 꼭 한번 읽고 싶었고 이제 읽었으며 그 여운이 꽤 오래간다. 역사서이지만 심장이 쿵쾅대는 한 편의 파란만장하고 굴곡깊은 한 인간의 얘기이다.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실천 철학을 주장하며 세상과의 무한한 교류를 꿈꾸던 다산이 접했던 현실은 당쟁의 휘몰이속에서도 꿋꿋했으며 그의 곁엔 언제나 주군 정조가 함께 했다. 새로운 조선을 꿈꾸는 정조임금의 정치적 개혁의 동반자로, 의혹에 쌓인 채 급작스런 죽음을 맞게 된 정조임금 사후 개혁의 조선이 아닌 암흑과 어둠의 시대로 역행하는 시절에 처참하게 가문의 몰살을 겪어야했고 형제를 잃었으며 세상을 버리고 은둔해야만 했던 지독히도 외롭고 처절한 인간이었다. 선교지원을 통해서가 아닌 독자적인 천주교인들의 신앙생활과 조선만의 삶이 아닌 조선밖의 이치를 받아들이려는 사고의 전환이 좁은 세상속에서 이루어지려하지만 뿌리 깊이 굳어진 거대 노론벽파의 지키고자 하는 삶의 방식과 독단은 끈질긴 피의 정쟁으로 치닫는다.
조선후기 어둠의 시대에 안타깝게 희생되었던 인물중에 다산의 막내형인 정약종은 하늘에 속한 자로 죽는 순간까지 신앙을 고수하며 약용과 약전을 살리고 결국 순교하였다. 그의 신앙고백은 물론 삼위일체론과 부활에 대한 믿음의 글들은 그 시대에 그런 해석을 할 수 있었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유학을 숭상하며 제사의 형식과 신주를 해하는 일에 갈등을 겪은 다산은 끝내 신앙을 버리지만 하늘에 오른 약종못지않게 땅에 남아 은둔하면서도 후학을 위한 학문예찬과 다독의 열정을 불태우며 200서가 넘는 수많은 책들을 쓰게 된다.
유배지에서의 18년이란 세월을 숨죽이며 언젠가 이루어질 세상과의 또 다른 교류를 위해 행한 학문에의 열정은 자신이 가진 최고의 장점이자 긍정적 에너지의 발산이라고 본다. 생각해보면 피비린내나는 암흑의 조선후기를 이겨낼 방도는 달리 없었을 것 같다. 빈곤한 시절이었지만 다산초당에서 펼친 후학양성과 글들은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가치있는 삶의 자세도 배우게 한다.
시대가 이렇듯 혼란할 때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죽을 것인가 살 것인가.
죽는다면 어떻게 죽을 것인가.
살게 된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다산이 학문과 씨름을 했다면 같은 시기 흑산도로 유배를 간 약전의 삶은 어부의 삶이었다. 다산 못지 않게 학문에 출중하였으나 그런 삶보다는 어촌에서의 삶과 어부들과 일과를 함께 하며 최초의 해양생태보고서인 자선어보를 집필하였다.
놀라운 일이다. 우리에게도 이런 멋진 인물들이 있었다니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모르겠다. 인물이 죽고 철학이 죽고 사고가 죽어버린 조선후기 어두컴컴하고 무서운 시대에 세상을 밝히는 촛불의 흔들리는 뜨거움으로 그들은 살았다.
역사에 가정을 들이대면 참 우습지만 정조임금이 10년만 더 살았어도,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의 안동 김씨세력들은 어찌 되었을까?
왕의 후사를 몰살하지 않았다면....망국의 깊은 한을 겪게 되었을까?
그렇게 안되었더라면 현재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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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