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인데 별로 보고 싶은 영화가 없다.

아니, 보고 싶은 영화들은 작은 예술영화관에서 상영하다가 스크린에서 내린지 벌써 오래고, 추석맞이용 기획 영화는 정말 싫다.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는 중에서 <세상의 끝까지 21일>을 골랐다.

 

<50/50>을 제작했던 제작진들이 또 다른 디스토피아 영화를 어떻게 그려내었을지, 그리고 주인공들인 키이라 나이틀리와 스티브 카렐 때문이었다.

 

 

원제는 <Seeking a friend for the end of the world>이니 "지구 종말을 같이할 친구찾기" 정도로 번역하면 되겠다.

 

시놉시스

 

 지구 종말이 21일 남았다는 뉴스를 차 안에서 듣던 아내는 갑자기 도망가고, 사람들은 정신없이 세상의 종말을 맞이한다. 모두들 가족이나 연인, 또는 종말을 같이 하고 싶은 사람들을 향해서 떠나든지, 아니면 도시를 폐허로 만드는데 나서지만, 안정된 보험 세일즈맨으로 살던 도지 (스티브 카렐)은 계속 출퇴근을 하며 일상생활을 계속한다. 

 

그는 3년 만에 이웃집 주민인 페니 (키이라 나이틀리)와 처음으로 인사를 나누고, 그녀는 3년동안 모아놓은 잘못 배달되었던 우편물을 건네주는데 그 속에는 도지의 고등학교 때 첫사랑 올리비아의 편지가 들어있었다.

 

수면과다증이며 레코드판을 수집하는 페니와 함께 폭동을 피해 첫사랑을 찾아 길을 떠난 도지는, 페니의 가족도 만나게 해주려고 한다.   

 

 

 

밝고도 진지한 디스토피아 무비

 

 

종말을 다룬 대부분의 디스토피아 무비는 주인공들이 종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아니면 영웅이 나타나서 종말로부터 인류를 어떻게 구하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죽음 앞에 선 인간의 모습은 초라하다. 최근 개봉했던 <월드워Z> <퍼시픽 림> <설국열차> <멜랑콜리아> 그 외에도 재난을 소재로 한 디스토피아 영화들도 많이 있다. <아마겟돈> 그리고 <엘리시움>이나 <오블리비언> 등도 지구의 종말 이후의 인류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대부분 영화들은 암울하고 잿빛이다. 인간이 지구의 종말을 바라보는 시각을 반영하듯이..

 

그러나, 이 영화는 종말을 맞이하는 인간들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도지 집에 청소를 하러 오는 엘사 아줌마는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갈등을 할때도 변함없이 마지막까지 도지 집에 청소를 하러온다. 평정심을 가지고 즐겁게 일을 하는 모습..가장 부러운 모습이다.

 

마지막이니 사람들은 도덕과 윤리, 체면을 다 버리고 마구잡이로 살기 시작한다. 심지어 남을 공격하거나 방화를 하고 폭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들도 직장에 나오지 않게 되자 빈자리가 많이 생긴다. 평소라면 꿈꿀수 없는 지위이다. 지하에 방공호를 지어놓고 비상식량을 가득 채워놓고 종말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고 대마초와 분별없는 섹스로 종말을 맞는 사람들도 있다.

 

주인공인 도지와 페니는 비교적 담담하게 21일 남은 종말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다. 죽기 전에 만나고 싶었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버킷리스트 1번으로 정하고 첫사랑이나 가족을 찾아 길을 떠난다. 여기서부터는 로드 무비.. 

 

 

 

코미디 배우의 진지한 연기가 종말을 무게있게 전달한다.

 

스티브 카렐은 주로 코미디 배우로 관객들에게 알려진 배우이다. 여러 애니메이션에서 목소리 연기도 많이 하였지만, <에반 올마이티, 2007> <브루스 올마이티, 2003> <호프 스프링즈, 2012>에서 닥터 펠드 역할, 그리고 많은 TV 시리즈에서도 종횡무진 활약하였다.

 

그러나 스티브 카렐은 이 영화 속에서 시종일관 진지한 얼굴이다. 거의 웃지 않는다. 페니 역을 맡은 키이라 나이틀리가 낙천적이며 개성강한 캐릭터를 연기하는데 비해서 스티브 카렐의 연기는 진중하고 무겁다. 마치 감독의 메세지를 그대로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듯이.

 

키이라 나이틀리는 독특한 캐릭터를 연기했다. 늘 예뻐보이려고 노력하지 않는 이 멋진 배우는 때론 과격하기도 하고 낙천적이기도 하고 용감하기도 하지만 레코드판 음악을 사랑하는 매니아이기도 하다. 스티브 카렐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키이라 나이틀리는 두 사람의 만남과 여행과 사소한 사건들을 통해서 결국 마지막 엔딩부분에 가면 너무나 잘 어울리는 사랑하는 남녀가 된다.

 

역시 배우들의 힘.

이런 작은 독립 영화에 기꺼이 출연하는 이 배우들이 너무나 멋지다. 

 

 

누구와 어디서 어떻게 종말을 맞이할 것인가?

당신의 버킷리스트는?

 

 

너무나 뻔한 스토리일 수 있었다. 스티브 카렐이 영웅이 되어 키이라 나이틀리를 구하여서 다른 행성으로 도망가든지, 아니면 지구의 종말을 막든지..

 

그러나, 이 영화는 대체로 시종일관 담담하다. TV 앵커는 마지막 방송임을 밝히며 끝까지 뉴스를 전달하고, 청소 도우미 엘사는 가장 담담하게 일상생활을 계속하며 종말을 맞이한다.

 

이 영화를 보면서 대부분의 관객들이 생각했을 것이다. "나라면 어떻게 할까?"

하나 더.."누구와 종말을 맞이할까?" 그리고 "어디서?"라는 질문을 덧붙이며.

 

가족과 종말을 맞이할 것인가?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떠날 것인가?

일상생활의 평온함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맞이할 것인가, 아님 평생 용기가 부족해서 못했던 일을 해볼 것인가? 모두들 함께 세상의 끝을 맞이하는데..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하는 영화였다. 가끔 종말을 보여주는 끔찍한 장면들도 있었지만, 대체로 밝고 명랑하고 그러면서도 주제를 진중하게 다루어서 좋은 영화였다.

디스토피아 영화의 지나치게 무거움이 없어서 좋았고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가 좋았고, 키이라 나이틀리와 스티브 카렐의 안 어울릴 듯 하면서 커플의 케미를 완성해 나가는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름다왔다.

 

누구와 어떻게라는 버킷리스트 작성도 좋지만,

서울시 아파트에 사는 시민으로서 "수도와 전기는 끝까지 끊기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을 가져봤다.

 

나만의 평점: 7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