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지 아니한가

더딘그리움
- 공개여부
- 작성일
- 2018.3.3
'만약'이라는 말처럼 허무한 말도 없지만 그만큼 소설의 모티브가 되는 단어도 없을 것입니다. 그들이 엇갈리지 않았더라면, 그날 주인공이 그곳에 가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적은 편지가 그에게 전달 됐더라면. 같은 '우연'의 줄기들은 독자를 안타깝게도 하고 슬프게도 합니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독자는 '만약에.. 만약에..'를 자꾸 되뇌게 됩니다. 최근에 다시 읽은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에서도 그런 장면이 나옵니다. 할머니가 과거로 돌아가는 꿈을 꾸는 것과 오스카가 상상하는 마지막 장면입니다.
드레스덴 폭격이 이뤄지기 전의 시간으로 시계가 돌아가고 할머니는 언니와 함께 침대에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할 말은 많았지만 새털같이 많은 시간이 있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냥 그대로 잠들 것 같았습니다.
언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언니가 말했어. 내일 말해도 되잖아.
내가 언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한 번도 말하지 않았지.(p.439)
오스카는 아버지가 9.11 테러로 세계무역센터로 가기 전의 시간으로 시간을 돌리고 싶었습니다. 아니 그 전에 건물에서 아버지를 구할 수 있을 때까지만. 그마저도 안된다면 건물에서 떨어지는 어떤 사람의 모습이 아버지라고 상상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소설의 마지막엔 건물에서 떨어지는 이름 모를 사람의 사진이 역순으로 15장 실려 있습니다. 처음에는 바닥에 거의 내려와 있지만 책의 마지막 장에는 사람은 건물로 올라섰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스카는 아빠가 여섯 번째 구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시간까지로 시간을 돌리는 상상을 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에요'를 거꾸로 말할 것이다.
아빠는 '왜 그러니, 얘야?'를 거꾸로 말할 것이다.
나는 '아빠?'를 거꾸로 말할 것이다. ...... 우리는 무사할 것이다. (p456)
이 박물관에서 가장 좋은 건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제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누구도 자기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10만 번을 보더라도 에스키모는 여전히 물고기 두 마리를 낚은 채 계속 낚시를 하고 잇을 것이고, 새는 여전히 남쪽으로 날아가고 있을 것이다....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유일하게 달라지는 게 있다면 우리들일 것이다.(p.164)
모든 것이 가식적이고 속물적인 것에서, 순수하고 때묻지 않는 어떤 가치들을 지키겠다는 홀든의 마음은 역설적이게 냉소적으로 표현됩니다. 그것은 그 시기 아이들의 전유물이거나 그들만의 특권입니다. 대단한 것도 아닌데 그것을 특권이라고 표현해야 하느냐면, 우리는 이미 그런 시기를 지나 모든 현상이 '그러려니'하는 사람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홀든은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제자리에 있는 박물관을 사랑합니다.
창녀의 아들로 로자 아줌마에게 키워지고 있는 모모는 처음 영화의 되감기 장면을 보고 무척 놀랍니다. 사람이 뒤로가고, 자동차가 거꾸로 달리고, 무너졌던 집이 다시 세워지는 장면은 짧은 그의 인생에서 본 일 중에 가장 멋진 일이었습니다. 모모를 보고 있던 사람들은 즐거워 하며 처음으로까지도 돌릴 수 있다고 말해줍니다. 모든 것을 처음으로 돌릴 수 있다는 근사한 생각은, 곧 죽을 것 같은 로자아줌마를 다시 예쁘고 잘 나가던 창녀시절로 돌려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상상까지 그를 이끌어 줍니다.
그중 털보 하나는 재밌다는 듯이 낄낄거리면서 그러다가 "에덴동산까지" 갈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그가 덧붙여 말하기를, "불행하게도, 다시 시작해봤자 결국 그게 그거야."라고 했다. (p.134)
어떻게 시간을 되돌려도 낄낄거리며 웃고 있는 털보의 말처럼 '다시 시작해봤자 결국 그게 그거'인게 아무래도 인생이겠죠. 어떤 것도 되돌릴 수 없고 그것은 소설에서조차 예외가 아닙니다. 심지어 타임리프 소설에서도 시간을 되돌리고 되돌리고 해봤자 결국은 비슷한 결과가 나오기 마련입니다. 세 소설의 공통점은 모두 화자가 어리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의 눈으로 보고 상상해 보는 것은 유치해서가 아니라 솔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어른도 그런 상상을 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어른은 그런 상상을 더 많이 하고 있을지도 모르죠.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후회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최대의 것을 지금 하는 것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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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