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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좋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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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공명에게 유비가 찾아갔을 때마다 그를 피하던 공명은 결국 유비를 만나게 됩니다. 유비를 만날 준비를 하는 동안 제갈공명은 범증을 떠올립니다. 항우에게 천명이 없는 줄 알면서도 그를 따라나섰던 범증! 제갈공명은 더 이상 자신은 범증의 어리석음을 탓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하며 이렇게 혼잣말을 합니다.



 




지난 겨울 내내 그대와 그대가 내 낲에 펼치려는 달갑잖은 명운을 피하느라 그토록 애썼건만 이렇게 되고 보니 결국 그대를 따라나서지 않을 수 없구려..(이문열의 삼국지, p. 147)




 



자신의 운명을 알면서 그 길을 가는 사람의 마음이 유난 기억에 남았던 것이었는지, 저는 이 장면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습니다. 끝을 알면서도 결국 그 길을 간다는 것이 마치 인간의 한계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운명에 굴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제갈공명의 비장함과 의연함, 운명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 혹은 그에 저항하는 미약한 존재 같은 생각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서인지 저는 책을 읽은 후에도 그 장면을 오래 기억했습니다. 



  



이와 비슷한 질문을 작가 김연수는 '소설가의 일' 에필로그에서 적은 바 있습니다. 2005년에 비슷한 또래의 두 사람을 각각 만난 적이 있는데 이들은 신기하게도 1991년 5월을 이야기 하면서 많이 울었다고 합니다. 참고로 1991년은 4월 26일에 명지대 강경대 학생이 시위 중 백골단에 맞아 사망한 후 연쇄적으로 학생들의 분신이 이뤄졌던 시기였습니다. 그 시절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시위대에 뛰어들던 그들의 마음을 생각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이를 생각하면서 쓴 소설이 바로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이었습니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저

문학동네 | 2007년 09월




 



그리고 김연수는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서 인용한 요한복음 12장 24절을 적습니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상)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 저/이대우 역

열린책들 | 2009년 12월





그렇다면 그 밀알들은 어디선가 열매를 맺고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살면서 그저 한 알의 밀알로 끝나버리는 경우를 너무 많이 봅니다. 그것이 우리를 가장 좌절 하게 하고 많은 현인들이 답을 찾고자 했던 질문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질문에 대한 답들을 많이 봤지만 '소설가의 일'의 에필로그처럼 감동받은 글은 본 적이 없습니다.   


 


1543년 포르투갈인들이 일본의 다네가시마에 도착하면서 천주교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으레 그렇듯 일본에서 천주교 역시 박해의 대상이었습니다. 결국 1644년 마지막 신부 고니시 만쇼가 순교하면서 천주교의 맥은 끊기고, 1657년 일본인 전도사인 바스찬이 '교황의 배가 로마에서 올 것이며, 독신의 신부가 마리아 상을 가지고 올 것'이라는 예언을 남깁니다. 실현될 가능성이 없는 예언임에도 이를 믿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다 끝내 그 실현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들을 카쿠레 기리시탄이라고 했는데 무려 250년을 대를 이어 그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865년 3월 17일 외국인 신부가 마리아 상을 들고 일본에 내립니다. 김연수는 그렇다면 그들의 예언은 이뤄진 것인지 아닌지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저는 이 마지막이 참 좋습니다. 


 





 












소설가의 일



김연수 저

문학동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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