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지 아니한가

더딘그리움
- 공개여부
- 작성일
- 2018.3.10
제갈공명에게 유비가 찾아갔을 때마다 그를 피하던 공명은 결국 유비를 만나게 됩니다. 유비를 만날 준비를 하는 동안 제갈공명은 범증을 떠올립니다. 항우에게 천명이 없는 줄 알면서도 그를 따라나섰던 범증! 제갈공명은 더 이상 자신은 범증의 어리석음을 탓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하며 이렇게 혼잣말을 합니다.
지난 겨울 내내 그대와 그대가 내 낲에 펼치려는 달갑잖은 명운을 피하느라 그토록 애썼건만 이렇게 되고 보니 결국 그대를 따라나서지 않을 수 없구려..(이문열의 삼국지, p. 147)
자신의 운명을 알면서 그 길을 가는 사람의 마음이 유난 기억에 남았던 것이었는지, 저는 이 장면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습니다. 끝을 알면서도 결국 그 길을 간다는 것이 마치 인간의 한계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운명에 굴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제갈공명의 비장함과 의연함, 운명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 혹은 그에 저항하는 미약한 존재 같은 생각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서인지 저는 책을 읽은 후에도 그 장면을 오래 기억했습니다.
이와 비슷한 질문을 작가 김연수는 '소설가의 일' 에필로그에서 적은 바 있습니다. 2005년에 비슷한 또래의 두 사람을 각각 만난 적이 있는데 이들은 신기하게도 1991년 5월을 이야기 하면서 많이 울었다고 합니다. 참고로 1991년은 4월 26일에 명지대 강경대 학생이 시위 중 백골단에 맞아 사망한 후 연쇄적으로 학생들의 분신이 이뤄졌던 시기였습니다. 그 시절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시위대에 뛰어들던 그들의 마음을 생각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이를 생각하면서 쓴 소설이 바로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이었습니다.
김연수 저 |
그리고 김연수는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서 인용한 요한복음 12장 24절을 적습니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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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