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지 아니한가

더딘그리움
- 공개여부
- 작성일
- 2020.7.7
'여도지죄(餘桃之罪)'라는 고사성어는 한비자 12장 '세난(說難)' 편에 나옵니다. 세난은 다른 사람을 말로써 설득하여 동감하게 만드는 유세가 그만큼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설득이 어려운 이유는 당연히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기 때문이겠죠. 상대가 명예를 중시하는데 이익을 내세우거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인데 명예에 관한 내용으로 설득한다면 그 말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내쳐질 것이 틀림없습니다. 유세의 어려움을 설명하기 위해 이런 구절이 나오기도 합니다.
'고로 요조의 말은 당연하였으나 진(晉)에서는 성인으로 칭송 받고
진(秦)에서는 처형을 당했으니 이는 살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요조는 왜 죽음을 당했는지에 대해 먼저 알아봅니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신문에서 잘 정리되 있어서 인용합니다.
어이설패(語以泄敗) - 말이란 새나가게 되면 실패한다.
물론 저자가 이 이야기를 실은 것은 모든 일에 비밀을 도모해야 한다는 의미에서였지만, 한비자의 '세설'편에 요조의 이야기가 나온 이유는 바로 마지막 단락 때문입니다. 모든 유세가는 군주의 총애가 깊어진 후에야 계책을 올려도 의심을 받지 않습니다. 섣불리 말을 꺼냈다가 제거된 자가 있는 것 역시 군주의 마음을 얻지도 못한 상태에서 자신의 주장만을 펼쳤기 때문에 의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바로 '여도지죄(餘桃之罪)'입니다.
옛날 미자하라는 사람이 위 나라 임금에게 총애를 받았다. 위나라 법에는 임금이 타는 수레를 몰래 타는 자에게는 발이 잘리는 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미자하의 모친이 병이 들었을 때 사람이 밤에 몰래 와서 미자에게 알려 주었다. 그러자 그는 슬쩍 임금의 수레를 타고 나갔다. 후에 임금이 이 일을 듣고 그를 칭찬하며, "효자로구나. 어머니를 위하느라고 발이 잘리는 벌도 잊었구나." 하였다.
다음 날 임금과 함께 정원에서 노닐다가 복숭아를 땄는데, 먹다가 맛이 아주 달아서 그 반을 임금에게 먹으라고 주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미자는 나를 무척 사랑하는구나. 맛이 좋으니까 과인을 잊지 않고 맛보게 하는구나." 하였다.
세월이 흘러 그의 미색이 쇠하자 임금의 총애도 식었는데, 임금에게 죄를 얻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놈은 본래 성품이 좋지 못한 녀석이었다. 과인의 수레를 몰래 훔쳐 타기도 하고, 저 먹던 복숭아를 과인더러 먹으라 한 적도 있었다."라고 하였다.
[한비자 중 '세난' 편]
미자하의 행동은 과거에 있었던 행동으로 그가 했던 과오는 이미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임금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한번은 칭찬을 했지만, 또 한번은 죄를 내렸습니다. 바뀐 것은 단 한 가지 미자하에 대한 임금의 총애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누군가를 애정으로 보고 안 보고의 문제라기 보단, 상대가 말을 하는 이에게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 전반에 관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결론을 미리 내려 놓고 평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평소 호감을 갖고 있던 사람이라면 어떤 말을 해도 좋게 해석하려고 하고, 안 좋은 감정이 있던 사람은 좋은 말을 해도 비꼬아서 듣게 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가 하는 말이 논리적으로 좀 더 완벽하면 상대를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거기에서 발생합니다. 좀더 상대에게 빈틈없는 논리로 몰아 부치면 설득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무리한 요구를 갖게 하는 법입니다.
이를 설명해주는 심리학 용어로 '확증편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개념은 자신의 신념과 맞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신념과 일치하지 않는 정보는 무시하려고 하는 경향을 일컫습니다. 우리가 접하는 정보는 상상 이상으로 복잡하고 불분명합니다. 우리는 이 중에서 자기 신념에 맞는 정보는 쉽게 찾을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데이비드 맥레이니는 '착각의 심리학'에서 이런 말을 남깁니다. 이 말은 강준만의 책에 인용되어 있습니다.
강준만 저
인물과사상사 | 2013년 12월
이들은 기존의 세계관에 맞춰 세상을 한 번 걸러 낸다. 그들의 필터가 당신의 필터와 같다면 당신은 그들을 좋아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들을 싫어할 것이다. 당신은 그들을 통해 정보를 얻으려는 게 아니라 자신의 믿음을 확인 받으려는 것이다. [강준만 / 감정독재]
임금이 확인하고 싶은 것은 미자하가 어떤 행동을 해도 호감을 확인하려고 했던 것이고, 나중에는 어떤 행동이라도 그 잘못을 확인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왔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자신들이 생각하고 싶은대로 생각할 뿐 생각보다 훨씬 감정적이며 비논리적입니다.
정말 안타까운 사실은 한비자가 '세난'에서 타인을 설득하는 어려움과 그 방법에 대해서 설명해 놓았음에도 정작 본인은 유세로 인해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해 사마천은 사기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한비는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일의 어려움을 알고 그것을 '세난' 편에서 매우 상세하게 다뤘다. 그러나 결국 진나라에서 죽어 자신도 오히려 그 위험을 피할 수 없었다. 나는 한비가 스스로 '세난' 편을 쓰고도 자신은 그 재앙을 피하지 못한 것이 슬플 따름이다. [사기 / 노자,한비열전]
한정주 저 |
상대는 진실을 알아주길 바라면서도 그것을 드러내기는 싫어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조조의 속마음을 너무 알아버려서 '계륵'이라는 암구호의 의미를 깨닫고 철군을 지시했던 양수가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 것 역시 군주의 마음을 너무 헤아려 앞서 갔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타인을 이해하는 일은 단순히 그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을 넘어서 너무 드러내지도 침묵하지도 않는 그 적당한 선에서 줄을 타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더 힘든 일일 것입니다.
- 좋아요
- 6
- 댓글
- 0
- 작성일
- 2023.04.26
댓글 0

댓글이 없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