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시 정각이 되자마자 시청 홈페이지를 새로고침 했다. 접속자가 몰리는 탓인지 접속은 버벅댔다. 빠르게 클릭하다 보니 새 글을 알리는 ‘N’이 붙은 합격자 발표 글이 새로 올라왔다. 글 옆에는 벌써 읽은 숫자가 116이었다. 공무원 시험 인기가 정말 많구나 싶었다. 이번에도 경쟁률은 30:1을 훌쩍 넘겼었다. 새 글을 클릭하는 손 끝이 살짝 흔들렸다. 합격자의 수험번호가 5줄로 나열돼 있었다. 나는 16006이라는 수험번호를 찾았다. 16002, 16003 ..... 16009. 혹시 옆으로 나열되었나 싶어서 옆으로도 봤지만 옆에는 17로 시작되는 수험번호들이었다. 몇 번을 봐도 16006은 없었다. 이번에도 불합격이었다. 아주 열심히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매번 떨어질 정도의 실력도 아닌 것 같은데 공무원 되는 길은 요원하기만 했다. 보고 싶던 한일 월드컵도 안 보고 공부했는데 운명은 잔인했다. 지난달 학원비 카드를 내어 주던 어머니의 그늘진 얼굴이 선연히 떠올랐다. 죄송스러운 마음과 창피함이 번갈아 차올랐다. 살짝 눈물이 고이려던 찰나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친구 정수였다. 보나 마나 합격했는지 물어보려는 전화였다. 누구와도 얘기하고 싶지 않은 순간에 가장 받기 싫은 사람에게서 전화가 온 셈이다. 정수는 그런 존재였다.

정수는 1년 전쯤에 고요독서실에 왔다. 정수가 독서실에 온 날은 내가 옆 자리 사람과 싸운 날이었다. 애초에 독서실 자리 추첨을 할 때부터 꼬였었다. 하필 냄새날 것 같은 장수생 아저씨가 내 옆자리에 뽑힌 것이다. 내가 창가 자리로 될 때만 해도 이번 분기는 뭔가 잘 될 것 같았는데 우럭 같은 아저씨가 내 옆으로 오자 화가 났다. 과장하자면 처음에 잘 풀리다 꼬일대로 꼬여버린 내 시험준비 기간 같았다. 처음 6개월 만에 합격반으로 들어가자 주변 사람들은 무척 놀랐다. 크게 열심히 한 것도 아닌데 왠지 일이 잘 풀릴 것 같았지만 그게 다였다. 그 뒤로는 꼬인 낚싯줄처럼 해결책이 보이지 않았다. 합격반에서도 제외되었고 영어는 80점 초반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우럭 장수생은 그런 내 인생을 증명하는 존재 같았다. 당연히 나는 그가 너무 신경쓰였다. 평소에 나는 쿰쿰한 냄새는 시간이 지나서 익숙해졌지만 담배 피우고 와서의 냄새는 정말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아니 시간차라도 두고 들어오면 좋으련만 공부는 못해서 장수생인 주제에 열정은 끝내줬다. 결정적으로 우럭이 나를 폭발 시킨 것은 계산기였다. 회계사를 준비하던 우럭은 공부의 기복이 확실했다. 공부가 잘 안되는 날은 옆 자리에 사람이 있는 지도 모를 정도로 조용했지만, 잘 되는 날은 그걸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소란을 떨었다. 특히 그 놈의 계산기. 계산기 두드리는 소리는 아무리 조심해도 미칠 지경이었다. 두어 번 메모를 남겼지만 그때 뿐이었다. 날씨는 덥고 공부도 안 되는 날인데 우럭이 텐션을 높여서 계산기를 두드리니 결국 폭발을 하고 말았다. ‘아 씨발.’ 독서실 사람들은 순간 일제히 고개를 들어서 나를 봤다. 풍뎅이도 나를 봤다. 내가 ‘잠깐 이야기 좀 하실래요.’ 하고 먼저 나갔다. 평소 내 성격 같지는 않았지만 그날은 그냥 뭐든 쏟아 버리고 싶었었다. 휴게실로 가는 길이었다. 정수가 등장했다. 나를 보러 온 것이라 생각하기엔 양 옆에 너무 큰 가방을 들고 왔다. 나는 대충 눈인사를 하고 우럭과 마주했다. 우럭은 으레 나이를 들먹이며 평소에도 싸가지가 없었다느니의 말을 쏟았고, 나는 책장 넘기는 소리며, 발가락으로 바닥을 툭툭 치는 소음에 대해 일일이 지적했다. 그 순간에도 차마 냄새에 대한 말을 하지 못하고 담배 냄새만 말하고 말았다. 애초에 해결될 일이 아닌 것을 서로 알았기 때문에 그냥 서로에게 언성을 높여 쏟아 부은 것으로 끝났다. 그럼에도 처음보다는 기분이 나아진 것을 보니 아예 도움이 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우럭도 나름 할 말을 다 했는지 처음보다는 누르러진 태도로 들어갔다. 그때 옆에 서 있던 정수가 다가왔다. 나는 내 처지가 장판 밑을 들춰서 보여주는 것처럼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정수를 반가워 하는 마음과 나를 보여주고 싶지 않은 거부감이 재빠르게 교차되며 그를 향해 억지 웃음을 지었다.

정수는 그런 친구였다. 친한 친구긴 하지만 종이에 베인 상처처럼 평소에는 잊다가도 건드리면 은근히 신경 쓰이는 그런 존재. 친구들이 모여 놀 때면 이야기를 주도하면서도 항상 누군가 바보 만드는 그런 친구였다. 그 대상이 내가 아닐 땐 웃기다가도 내가 그 입장이 되면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은근히 띄워주는 말을 하면서도 다른 사람이 깎아 내릴 여지를 슬쩍 흘리는 것도 안 좋은 버릇이었다. 야 ‘민우 잘 생겼잖아.’ 라는 말 다음에는 으레 ‘야 차라리 니가 더 낫지.’ 같은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 질문에 원하는 답이 나오면 무척 통쾌해 하면서, 상대의 말이 웃겨서 웃는 것마냥 자신의 의도를 웃음에 담는 친구였다. 그럴 때면 집에 가는 내내 그 말이 떠올라서 화를 참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다른 친구한테 기분 나쁜 것을 이야기하자니 나만 소심한 사람 같아서 꺼내기도 조심스러웠다. 그래도 리더십이 있어서 항상 모임을 주도하고 이야기를 끌어가는 애였다. 그 거슬리는 마음 한 편엔 우럭과의 사이에서 내 편이 생겼다는 안도감도 없진 않았다.

하지만, 나를 거슬리게 하는 그 성격은 얼마 가지 않아 드러났다. 기본서를 1회독 할 때까지는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고마워하더니 6개월쯤 지나면서 나를 은근히 무시하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내가 잘 모르거나 헷갈리는 게 있으면 1년 넘게 공부했는데 이런 것도 모르냐는 느낌의 말투가 무척 거슬렸다. 처음에는 같이 밥도 먹고 쉬는 날에 피시방도 함께 다녔는데 어느 순간부터 서로가 불편해졌다. 표면상으로 변한 건 없었지만 정수 역시도 나와 오랜 시간을 보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독서실 총무에게 부탁해서 옆자리로 앉았다는 사실이 무척 후회가 됐다. 나는 정수 특유의 낮은 비음을 내는 버릇을 참을 수 없었다. 너무 사소해서 말하기도 애매했지만 한 번 신경이 쓰이기 시작하면 내 귀에 대고 직접 내는 소리처럼 괴로웠다. 내가 말을 하면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고 깜짝 놀라겠지. 보나 마나 상상치도 못했겠지. 본인이 얼마나 주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지. 그런 일로 지적을 받는다면 당사자는 더 괴롭겠지.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거슬리는데. 하는 생각을 하다 보면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흘러 있었다. 나는 그런 일 같지 않은 일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정수를 습관적으로 원망했다. 독서실에서 나와 집에 갈 때면 뭘 그렇게 예민했을까 싶다가도, 다시 또 옆에서 그 소리를 듣게 되면 이러다 사람이 정신병에 걸리는구나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정수가 공부한 지가 1년이 조금 못 됐으니 내가 그보다는 먼저 나갈거라는 은근한 경쟁의식이 생긴 것도 그 즈음이었다. 저걸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빨리 합격하자. 여기서 나가면 정수랑은 정말 가끔씩만 봐야겠다. 하고 생각했다.

“결과 확인했냐? 합격했어?”

내 눈치도 살피지 않고 너무 무례하게 합격이라는 말을 올리는 정수를 보면서 그 동안의 짜증스러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진짜 친구면 목소리 톤이나 말투를 보고 넘겨짚으면 되지 대뜸 어찌됐나를 묻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건 합격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의 태도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태연한 척 답했다.

“됐겠냐. 지방직은 문제가 지랄 같아서 점수가 안 나와.”

뭐라도 변명하고 싶어서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나왔다. 말을 하면서도 ‘1년이나 먼저 들어온 놈이’라면서 술자리서 농담하던 정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는 중에도 뭔가 정수 목소리가 들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걸 진작 알아차렸어야 했다.

“야 그래. 곧 국가직도 있고 서울직도 있잖아. 그냥 다음을 노려야지. 어차피 너는 금방 될 거야.”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는 않았지만 나를 무시하는 친구가 하는 소리라 의외로 조금 마음이 놓이긴 했다. 그래 뭐 다 같이 합격하면 그 보다 좋은 일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 때 정수가 말을 이었다.

“나는 이번에 운 좋게 됐다. 존나 기대도 않고 있었는데 신기하네. 니도 금방 되겄지. 어차피 시험은 운이잖아.”

“엉? 합격했다고? 아 진짜?”

워낙 갑작스럽고 놀라운 일이라 축하한다는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나는 정말이냐고 되물으면서 이 일이 놀랄 만큼 좋은 일인 척 가장했다. ‘진짜?’라는 물음은 그럴 리가 없다는 의심으로도, 믿을 수 없다는 축하로도 해석할 수 있는 단어였다. 물론 정수는 후자로 들었겠지만 내 마음은 조금도 좋지 않았다. 비참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심지어 학원 모의고사 때도 커트라인에서 7~8점은 낮은 점수가 나오던 정수였다.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내가 세 번 떨어진 것보다 그 충격은 훨씬 컸다. 나는 마지못해 다시 말을 꺼냈다.

“야 축하한다. 너 진짜 대단하다.”

“운이 좋았지. 너도 금방 할 거야.”

하는 말마다 대패질 안 한 목재처럼 거슬렸다. 자꾸 ‘운’을 운운하는 것도 맘에 안 들었다. 으레 금메달 딴 선수들이 소감을 말할 때 이번에는 운이 좋았습니다. 연습 때보다 잘 풀렸습니다 라고 하지 않나. 그것도 금메달이냐 은메달이냐 하는 사람이 하는 소리지 택도 없는 점수로 있던 놈이 무슨 운 타령이야. 사실 금메달리스트도 ‘제가 최고죠.’라는 말을 겸양의 의미로 바꿔하는 소리가 ‘운이 좋았다’는 말 아닌가. 사실은 실력으로 된 게 아니겠냐는 정수 말의 행간 의미를 알기 때문에 더 목소리가 듣기 싫었다. 평소보다 더 거만한 말투에 별것 아니라는 듯한 자신감이 나를 더 화나게 했다.

“오늘 저녁에 시간 되지? 내가 소고기 쏠게 이따 보자.”

다른 친구한테 또 자랑을 하려고 하는 지 정수는 자기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거절하고 싶었는데 그마저도 하지 못했다. 내가 떨어진 마당에 합격자가 사는 술자리를 가야한다는 사실이 너무 가혹하게 느껴졌다. 잔뜩 맞은 권투선수가 승자가 함께 들어주는 손으로 만세하는 느낌이었다. 그냥 핑계라도 댔어야 했는데 그 타이밍을 놓친 내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다시 못 간다고 하면 떨어졌다고 친구 합격도 축하 못 해주는 옹졸한 놈이 될 것 같았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는 중에도 떨어진 복권 번호를 다시 확인하는 사람처럼 혹시나 하는 생각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합격할 수준이 아니니 사실 나한테 이기고 싶어서 거짓말하는 것은 아닐까. 조용히 독서실을 나가고 혼자 공부하려고 거짓말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은근한 기대를 하고 있다가도 그런 자신이 수치스럽고 한심하게 느껴져 생각을 멈췄다.

약속 장소에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인 친구 둘이 더 나와 있었다. 그들도 불합격하긴 했지만 준비 기간이 짧아 크게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정수의 모습이 곧 자기들 모습이 될 거라는 기대에 부풀어 보였다. 정수는 사장님께 꽃등심을 주문했다.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나는 그게 마치 나를 조롱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그냥 돼지고기나 먹자 했다. 마치 시골의 논, 밭이 올라서 벼락 부자가 된 사람이 마을 사람들 앞에 벤츠 타고 등장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굳이 안 해도 될 일을 해서 내 심기를 건드렸다. 그럴수록 정수는 묘하게 히죽거렸다.

“어차피 엄마 카드니까 그냥 막 먹어도 돼. 걱정 말어. 내가 너네한테 이거 하나 못 사겠냐.”

원래도 워낙 예의가 없던 놈이 합격을 먼저 하고 나니 고시 합격한 것처럼 거만했다. 원래도 술을 마시면 혼자서만 이야기를 했지만 주인공이 되니 정말 가관이었다. 술이 어느정도 들어가자 이제는 우리를 앞에 두고 공부 방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국사 점수가 처음에는 안 나와서 고민이 많았거든. 근데 요즘에는 정재준 잘 안보잖아? 내가 인터넷에 알아봤더니 민주국사를 많이 보더라고. 내가 그래서 보던 책 과감히 버리고 새로 시작했지. 국사는 흐름이잖아. 그거 한 번 잡히니까 그 다음부터는 웬만해서는 안 헤깔리더라고. 영어는....”

정말 한도 끝도 없었다. 나는 그 말들이 우습게 들리기도 하고 고깝기도 했지만 그래도 합격자의 말이다 보니 살짝 귀담아 듣게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비아냥대듯이 말하는 건 짜증나지만 그래도 나보다 잘해서 합격한 건 사실이었다. 마냥 질투심에 빠져 있을 수도 없는 일 아닌가. 술이 한 두잔 들어가자 내 맘은 실온에 있는 생크림처럼 녹아버리기 시작했다. 모르는 사람이 합격한 것도 아니고 친구가 합격했는데 속 좁게 굴지 말자는 생각도 들었다. 한 번 좋게 생각하기로 하자 그렇게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어쨌든 나보다 잘 봤으니 이런 저런 조언도 들으면 되고, 독서실에서 본인이 쓰던 책이나 물품도 주고 가기로 해서 한심하게 기분이 나아졌다. 나는 평소에 봐왔던 2단 독서대와 영어, 행정학 기본서를 달라고 했다. 정수는 3차에 가서는 양주를 먹자고 했다. 꽃등심을 먹을 때는 뭔가 나를 놀리는 것처럼 느꼈었지만 어차피 노는 거 그냥 마시는게 낫겠다 싶었다. 벤츠를 흉보다 같이 차에 타서 신나게 놀러 가는 기분이었다. 합격해서 산다는데 굳이 내가 복잡하게 생각할 이유는 없었다. 12시가 넘게 술을 마시고 나자 우리는 흡사 4명의 합격자가 모인 것 같았다. 시끄럽다고 옆테이블에서 항의가 들어와도 그냥 기분이 좋기만 했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그래 좋은게 좋은거니깐. 친구가 잘 되면 좋은거지. 라고 생각하면서 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6시 25분이었다. 늦었다. 새벽반에 좋은 자리 앉으려면 6시에 출발했어야 했는데 너무 방심했다. 씻지도 않고 옷을 챙겨입고 지하철을 타러 가다 문득 정수가 떠올랐다. 아 이제 그놈은 이렇게 일찍 안 일어나도 되는구나. 8시 되면 준비해서 출근하고 6시 되면 칼퇴근하는 공무원이구나. 간밤에 느꼈던 동질감이나 친구의 우정은 아침의 비루한 현실에서 누더기가 됐다. 힘들 때 친구가 진짜 친구라고? 아니지. 좋을 때 친구가 진짜 친구지. 이렇게 조금도 축하가 안 되는데 내가 무슨 친구는 친구. 강의실에 들어가자 앞자리는 이미 빈자리가 없었다. 기둥 때문에 고개를 이리저리 틀어야 하는 자리에 앉았다. 분주히 칠판을 보면서 필기를 하는 동안 눈 앞에서 알짱거리는 기둥이 정수처럼 느껴졌다. 빨리 놓아주고 싶은데 끈질기게 머릿속을 따라다녔다. 정수 생각과 숙취 때문에 그 날은 정신이 없었다. 강의를 듣고 오후 3시쯤 독서실로 갔다.

언제 다녀갔는지 정수는 그새 독서실을 깨끗이 비웠다. 거기에는 어제 친구들이 말했던 책과 물품이 사람별로 구분돼 놓여 있었다. 나는 내가 부탁했던 독서대와 영어, 행정학 기본서를 내 자리로 옮겼다. 공부를 어찌 한 건지 책은 새책처럼 깨끗했다. 행정학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다 왼손으로 책을 들고 오른손으로 한꺼번에 책장을 넘겼다. 새책 냄새가 좋았다. 그때였다. 정수가 연습용으로 쓰던 답안지가 바닥에 떨어졌다. 이름과 응시번호 생년월일을 쓰는 난에 일일이 컴퓨터용 펜으로 표시가 돼 있었다. 아마도 시험시간에 맞춰 보려고 연습용으로 쓰려던 답안지였던 것 같았다. 생각 없이 보고 있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가산점란에 체크가 돼 있었던 것이다. 유공자란에 가점 10점이 선명히 체크돼 있었다. 여태 한번도 나에게 유공자라고 말한 적이 없었는데 떡하니 그런 체크가 돼 있었다. 책을 더 살펴보니 답안지 다음 페이지에 국가유공자증 사본이 있었다. 유공자는 본인이 아니라 정수의 아버지였다. 그러고 보니 전에 아버지가 군대에서 태권도를 하다 다쳤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아버지가 유공자라는 이야기도 그래서 아들인 자기가 가점이 있다는 소리는 더더욱 없었다. 나는 심한 배신감이 느껴졌다. 이제야 그 모든 의문점이 풀렸다. 점수가 그렇게 낮은데도 합격을 하고, 공부도 오래 하지 않고 자신감을 가졌던 이유들 말이다. 정수는 애초부터 나보다 열발짝은 앞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심한 배신감을 느낀 나는 우럭에게 욕한 이후로 다시 한 번 제법 큰 소리로 욕을 했다.

‘에이 시팔. 못된 새끼.’

나는 독서실을 나와 무작정 걸었다. 어딘가 정해진 곳에 가면 기분이 풀리기라도 한 것처럼 계속 걸었다. 가장 문제는 내가 왜 화가 나는지 나조차도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괜찮은 놈은 아니지만 그래도 친구가 합격한 것이다. 더구나 정수가 나한테 유공자라고 한 적은 없지만 아니라고 한 적도 없지 않은가. 내가 물어보지 않았던 것 뿐인데 그걸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나. 나는 나름 정수 편에서 생각해 보자고 애를 썼다. 그래 나한테 피해준 것도 없지 않나. 이해하자. 이해하자. 그럴 때마다 정수의 조소하는 입꼬리가 생각났다. 문제에 답을 못하면 그렇게 오래하고 그것도 모르냐는 듯 끝을 올리던, 합격술을 사는 자리에서 훨씬 더 거만해진 말투로 나를 배려하는 가소로움이 떠올랐다. 특히 나는 그 배려가 맘에 안 들었다. 걱정해주는 척 하면서 나를 놀리는 듯한 그 말투. 지적하면서 비난하기도 애매하고 그냥 넘어가기에는 화가 나는 그 말투. 사람들한테는 친절한 듯 보이지만 손해 보는 일에는 절대 그냥 안 넘어가는 아이. 내 안에서 정수는 점점 악마같은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또 뭘 듣겠다고 술자리에서 공부 방법이며, 요약이니 강사 추천은 듣고 있었는지 한심했다. 다시 돌아가면 독서대부터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합격자는 무슨. 이런 저런 생각에 걷다보니 근처 대학교 운동장까지 와있었다. 머리에 띠를 두르고 달리는 사람, 꼭 붙어서 손을 잡고 걷는 연인, 아이를 데리고 나온 아빠와 엄마, 잔디밭에 앉아서 치킨을 먹는 사람들. 그 모든 군중 속에서 철저히 나만 혼자 떨어져 나와 있었다. 모두가 세상과 연결되어 각자의 목적으로 살아가는데 나는 왜 여기 있는지 우울해졌다. 때마침 해는 지고 있었다. 엄마는 이번에는 내가 합격했을 거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을텐데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생각도 들었다. 온갖 현실의 걱정이 파도처럼 밀려들면서 모든 것이 두려워졌다. 매일 지는 해도 내일이 되면 어김없이 떠오르고, 인생이 오르막이 있다면 내리막이 있는 법이라는데. 내 인생은 매일 매일 오르막 고통뿐인 것인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날인데도 모든 것이 다 망가진 듯 느껴졌다.

잔디밭에 앉아 해가 지고 노을의 잔상만 남은 하늘을 보고 있었다. 모든 것이 평화롭게 느껴질수록 마음은 더 황량해지는 기분이었다. 운동장을 둘러싸는 낮은 둔덕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해가 지면서 주변은 조금씩 침묵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때 나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곤충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흰점박이꽃무지였다. 어릴 때 우리가 풍뎅이라고 부르며 놀았던 곤충이다. 뒤집혀진 채 이제 더 이상 힘도 남지 않아 한 개의 발만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떤 힘으로도 풍뎅이를 다시 살릴 수 없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냥 보고 있었다. 이내 미세한 움직임마저 사라졌다. 그도 한 때는 굼벵이였고, 애벌레였고 번데기였었겠지.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을 하고 주어진 소임이 끝나고 흙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성충이 되고나서 한 순간도 저렇게 뒤집어진 적이 없었을 것이다. 왜 마지막엔 결국 뒤집어지는 것일까 생각했다. 왜 모든 곤충은 죽을 때는 모두 뒤집어지는 것일까. 나는 순간 작은 사실 하나를 생각해냈다. 풍뎅이는 평생을 여섯 개의 다리로 몸을 지탱했다. 한 때는 다리 끝에 온 힘을 모아서 나무에 붙어 있었고 어느 때는 단단한 착지도 했다. 악착같이 생의 의지를 가지고 있는 한 그가 뒤집어지는 일은 없었다. 곤충이 뒤집어지는 것은 다리에 힘이 빠지는 순간이었다. 언제든 힘이 빠지면 뒤집어져버릴 운명이었지만 그는 생애 모든 순간을 살겠다는 의지로 견뎌낸 것이다. 모든 것을 쏟아내고 마지막 순간이 와서 다리에서 힘이 빠지고 쪼그라드는 순간 태초의 운명처럼 그는 뒤집어지고 말았다. 사는 것이 어쩌면 그런 것이겠지. 기를 쓰고 버텨야 겨우 제대로 서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붉은 여왕의 나라에 갔었다. 가자 마자 여왕은 소리친다. ‘빨리 뛰어.’ 영문도 모르는 앨리스는 무작정 뛴다. 신기한 점은 그녀가 아무리 뛰어도 주변 풍경이 하나도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지쳐서 쓰러진 앨리스가 여왕에게 묻는다. ‘제가 있던 곳에서는 이렇게 뛰면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데 왜 여기는 모두 그대로죠?’ 여왕이 답한다. ‘이곳은 네가 뛰면 주변 사물이 다 같이 움직이기 때문에 제자리를 지키려면 계속 달릴 수밖에 없다.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면 두 배 빨리 달려야해.’ 앨리스는 그저 지쳐서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숨도 쉬지 못하게 뛰고 있지만 여전히 제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내가 뛰는 순간 주변 사람들은 더 빨리 뛰어서 나는 항상 현상유지만 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그 모든 현실이 벅차기만 했다. 정수처럼 앞서서 뛰는 사람이 골인하는 것을 보며, 뒤에서 오던 사람들이 나를 앞지르는 것을 보며 나는 등속도로 뛰고만 있다. 언젠가 이 레이스가 끝나는 날이 오긴 오겠지. 그 때 나는 웃으면서 이야기할 날이 있겠지. 하고 생각했지만 그 짧은 순간에 스치는 어떤 생각도 나에게 희망을 주지는 못했다. 나는 지는 해가 사라진 건물 뒤편의 선명한 해의 잔상을 언제까지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 답이라도 있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