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지 아니한가

더딘그리움
- 공개여부
- 작성일
- 2013.10.24
강신주 저 |
군대에서 책장의 책을 다 읽고 읽어 도저히 읽을 책이 없어서 마지막 고른 책 '논어'
읽는 동안 참 여러번 감동 받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논어'를 중고등학교 필수 과정에 넣고 나서야 우리 교육은 비로소 바로 설 수 있을 것이라는 핑크빛 개혁을 꿈꿨다. 전역을 하고 교양과목으로 공맹철학까지 듣고 난 후 현실에 사는 동안 논어를 잊었었다. 가끔 사회 저명인사들에게 단 한권의 책을 추천하라면 뭘 하시겠습니까? 라고 물어보면 , 으레 답은 '논어'입니다 라는 말은 듣고 살았으니 전혀 잊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랫만에 공자 관련 책을 샀다. 더구나 요즘 한창 나의 과심사인 강신주 교수님 책이니 덮어놓고 우선 읽었는데 이거 내가 생각했던 내용이 아니다. 무작정 관중과 공자를 치켜세워 주는 순진한 생각을 갖고 덤벼서일까 다소 반전스럽기까지 하다.
관중과 공자는 왜 한 책에 실리게 되었는가.
우선은 그 둘이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제자백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데 표면적으로는 한 명은 군주에게 중용 되고 한 명은 안 됐다는 점이고, 실질적으로는 사상에 있어서 미묘하게 달랐다는 점이다.
관중은 장사로 인해서 다져진 동물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부분은 후에 관중의 행적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를 통해 관중은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었고, 그들이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고 제후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왔다. 결국, 제나라 환공을 도와 처음으로 패권을 잡을 수 있도록 했다는 사실은 많은 제자백가들에게 귀감을 줬다.
그 중에서도 공자는 특히나 더 고무되었다.
이유는 관중이 주나라의 '예'를 정치에 적용 시켜서 성공한 사례였기 때문이다. 다시 주나라의 예를 살려 부국강병에 성공할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공자에게 그런 선례가 있다는 것은 그 길이 옳다는 증거였으므로.. 하지만, 결론을 말하자면 공자는 75개의 국가 어디에도 중용되지 못했고, 그의 유학을 부분적으로라도 받아들인 나라는 새로운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되었다. 그의 사상은 개혁 논리에 반감을 가진 기득권 세력의 자기 정당화 논리로만 통용되었을 뿐이었다.
그런 결과를 가져온 데는 공자가 관중의 결과물에만 도취된 채 과정을 간과하는 우를 범했기 때문이다.
산을 오르는 길을 찾는 과정을 예로 드는 저자의 말을 들어보자. 산을 오르는 데는 여러 길이 있을 수 있다. 좁게 난 오솔길일 수도 있고, 많은 이가 지난 등산로 일수도 있고, 수풀이 우거진 거친 길을 수도 있다. 이를 선택함에 있어 관중은 시대가 변하고 계절이 바뀌는 것에 따라 적절한 길을 선택했지만, 공자는 오직 한 길, 주나라 사람들이 다니던 '예'의 길만을 고집했다. 하지만, 전국시대에는 이미 주나라의 예만으로 혼란을 종식 시킬 수 없다는 것이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결국 춘추시대의 혼란을 해소하겠다는 공자의 실천적 신념은, 현실과 삶으로부터의 초연함을 이야기하면서 근본적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이제 공자의 사상은 철학이 아닌 일종의 종교로 승화되고 만 것이다.(p.225)
세상이 뒤집혀도 예를 지켜야 한다는 말은 옳지만 우리는 현실 때문에 지키기 힘들다. 하지만 항상 우리는 그것이 옳은 것임을 안다. 지켜야 하지만 지키기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도리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생활 뿐 아니라 의식에서까지 도리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에, 우리 개개인은 그런 스트레스를 견딜 자신이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사상이 현실에서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로 설정된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라고 주장한 데 있다.
공자는 70여명의 제자들을 이끌고 이런 형이상학적 신념을 실현시킬 나라를 찾고 다녔지만 등용되지 못했다. 그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어리석어서가 아니고 그들도 이미 경험으로 그런 논리가 현실에서는 실현되기 힘들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주나라가 그런 예가 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국가=가족 이라는 도식이 가능한 나라였기 때문이었지만, 전국시대는 이미 그런 규모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에 반해 관중은 우선 백성들의 '니즈'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다음은 관중의 말이다.
백성들은 곡식창고가 가득 차야만 예절을 알며, 의식이 풍족해야만 榮辱(영욕)을 알게 된다. 임금이 법도를 준수하면 六親(육친)이 굳게 단결하게 되고, 四維(사유)가 해이해지면 나라는 멸망하게 된다. 위에서 내린 명령은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민심에 순응하게 된다.
관중과 공자는 백성의 무서움을 알았고 국가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들의 힘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관중은 그들의 경제를 충족시킨 후에 국가를 경영하려 했고, 공자는 위에서 예만 지킨다면 자연스레 백성들은 좇아온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혼란하던 당시 상황에서 공자의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비현실적으로 들릴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왜 다시 논어로 돌아왔나
진나라가 지방분권을 무시하고 중앙집권적으로 폭정을 하는 바람에 고통을 겪었던 기득권 세력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보장해 줄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그리고 한나라 또한 그들의 기득권을 인정해 줘야할 필요성이 있었고 그 논리의 시발점에 논어가 있었다.
논어를 읽을 때는 모르지만 한 발 떨어져서 생각하면 논어는 미안스럽게 너무 가부장 적이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공경하는 게 나쁜 건 아니지만, 문제는 모든 것들에 다 순위를 매겼다는 것이다. 남자는 여자의 위에 아버지는 아들의 위에 왕은 백성 위에, 결론은 위에 있는 사람들이 예를 지키면 아랫사람들은 자연스레 따라온다는 것이다. 이는 쉽게 말해 위에 있는 사람들, 즉 기득권 층에 매우 유리한 논리이다. 어디든 강자의 지위에 있는 사람은 그것을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논어를 깊이 파고 들 수록 논어 안에서 기득권을 강화하고 민중과 여자들이 설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여자와 소인은 관계하기 어렵다. 가까이 하면 불손해지고, 멀리하면 원망한다.”
- 논어 ‘양화’-
"번지가 곡식 심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공자가 말했다. "나는 늙은 농부만 못하다."
다시 채소밭 가꾸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 받자 공자가 말했다. "나는 늙은 농사꾼만 못하다."
번지가 나가자 공자가 말했다.
"소인이구나 번수는! 윗사람이 예를 좋아하면 민중은 공경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렇게만 되면 사방의 민중이 제 자식을 포대기를 싸업고 모여들 것인데, 곡식 기르는 법을 어디에 쓰겠느냐"
- 논어 '자로' -
공자 이론의 맹점은 통치자와 피통치자, 군자와 소인의 위계질서 자체의 인정에 있다. 공자가 이르는 인과 지의 개념도 동등한 존재로서의 민중이 아니라 지배계층의 귀족적 고상함이었다. 이는 결국 공자 이론이 귀족층의 정당화 논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부분이 또 공자의 사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피지배계층이 의를 찾지 않고 사사로운 이익에 매달리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계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단편적 결과만을 해석하면서 스스로 갇힌 사고를 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종종 사회 지도층의 추천 도서 목록에 '논어'가 항상 빠지지 않는 것을 본다. 그것은 얼핏 보면 논어가 여전히 우리 사회에 유효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하지만, 논어의 내용은 다분이 가부장 적이고 권위적이다. 이는 어디에 유리할까. 당연히 기득권 층에 유리하다. 만약 내가 회사 내의 간부라면 논어를 적극 추천할 것이다. 우리는 너희를 이렇게 예로써 대하고 있으니 우리가 삐긋 거리는 것은 너네가 무지몽매한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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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