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지 아니한가

더딘그리움
- 공개여부
- 작성일
- 2013.12.25
땅강아지와 개미가 땅 위를 기어갈 때 사람이 발로 밟고 지나간다. 발에 밟힌 땅강아지와 개미는 눌려죽고, 발에 밟히지 않은 것은 다치지 않고 온전히 살아 남는다. 들풀에 불이 붙었을 때 마차가 지난 곳은 불이 붙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것을 좋아하며 행초라고 부르기도 한다. 발에 밟히지 않는 것, 불길이 미치지 않은 것이라도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우연히 불이 붙었고, 사람이 길을 가다가 때맞게 그렇게 된 것이다. -논형, 행우-

왜 이 말들을 장황하게 주욱 써 놨을까요?
세계는 우발적이기 때문이죠. 내 뜻대로 안되요.
사람들은 착각에 빠지죠. 내가 열심히 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라고.
왕충은 그런 면에서 냉철하죠.
그는 충성을 다하고 죽은 인물들도 기록하죠.
왜 죽었을까요?
그냥.
재수 없는 왕을 만난거죠.
어떤 간신은 오~랫동안 안 죽어요. 말아먹어도 몰라요.
그럴 수도 있는거예요. 요행인거에요.
세계는 그렇게 움직여요.
거미가 줄을 쳐두면 날벌레가 지나가다 벗어나는 것도 있고 잡히는 것도 있다. 사냥꾼이 그물을 쳐 놓으면 짐승들이 떼 지어 달리다가 잡히기도 하고 빠져나가기도 하다. 어부가 강이나 호수의 고기를 그물질하다 보면 잡히는 것도 있고 빠져나가는 것도 있다. 간교한 도적이 큰 죄를 지었어도 발각되지 않기도 하고 작은 죄를 돈으로 면제 받으려다가 발각되는 경우도 있다. -논형, 행우-
동양의 정신 중의 딱 하나가 서양의 철학이 유치해 보이게 하는데,
서양철학은 '우발성'을 사유 못하기 때문이죠.
동양은 '진인사 대천명' 같은 철학이 있죠.
내할일 다하지만 결과는 내 뜻대로 안되요.
내가 하는 일이 좋은 결과를 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죠.
동양사람들이 가진 파괴력은 거기서 와요.
협소하게 보지 않아요.
하지만, 자신의 능력 한도 내에서는 노력은 해요.
풀이 덕을 많이 쌓아서 마차 바퀴가 지나간게 아니라
그.냥. 지나간 거에요.
때문에 동양철학은 어떠한 결과에 대해서도 의연할 수 있는 거죠.
서양 텍스트들은 인과적으로 연결되죠.
하지만, 동양 텍스트는 안 그렇죠.
이렇게 했으면 이렇게 되야 하는데 동양 철학은 안 그래요.
왕충의 '행우' 편에서는 그런 사례만 나열한 거죠.
물고기가 덕을 쌓아서 그물에 안 걸린게 아니라 그냥 안 걸린거고,
길다다 똥을 밟았으면 내가 무슨 잘 못을 한게 아니라 그냥 밟은 거죠.
동양철학은 인과적으로 사건이 진행되지 않을 경우까지 염두에 둔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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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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