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딘그리움
  1. 좋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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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땐 항상 책장에 문학 전집이 한두질 있기 마련이죠. 그때는 문학전집을 팔러 다니시는 분들도 많아서 저희 집에도 '계몽사 소년 소녀 문학 전집'이 하나 있었습니다. 특히 이 전집은 저를 지속적으로 괴롭게 했습니다. 티브이를 보며 놀고 있는 저에게 엄마의 공격은 이 한 마디로 시작됩니다. '너! 숙제 다 했어?' 가끔 운 좋게 끝내 놓은 경우가 있죠. 그러면 다음 공격은 책입니다. '그러면 책봐' 그러면 저는 또 '어제도 봤...는데.' 그때 엄마의 회심의 공격! 계몽사 어린이 전집을 삿대질하듯 가리키며, '너 저거 다봤어?' 이 말은 항상 필살기입니다. 국민학생이 15권이나 되는 전집을 다 봤을리 없으니 말이죠. 그래서 저는 전집이 정말 싫었습니다. 누구는 집에서 할 게 없어서 전집을 다 봤다던데, 집에 할 일 없으면 나가서 놀것이지 왜 그랬을까. 집에만 있으니까 심심할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책을 빼듭니다. 제가 제일 좋아했던 책이면서 유일하게 읽은 책은 딱 두 권 뿐입니다. 하나는 오징어 외계인이 나오는 (무려 진화한게 그 모냥이라는 게 너무 신기했던) '우주전쟁'과 '서유기'였습니다. 문어 대가리가 무척 진화한 생명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해준 소설이 우주전쟁이었다면, 서유기는 좀 더 철학적으로 국민학생이던 저에게 '후회' 혹은 '만약'을 가르쳐 준 소설이었습니다. 



 



서유기에서 손오공은 초반에 나쁜짓을 하고 돌아다니다가 어느날 여래를 만납니다. 옥황상제의 자리를 내 놓으라는 손오공에게 여래는 '그렇다면 내 손바닥에서 빠져 나가 보아라. 성공한다면 너에게 천궁을 양도 하겠다.'고 합니다. 한 번 공중제비로 10만 8천리를 단숨에 날아가는 손오공은 쾌재를 부르며 날아가기 시작합니다. 한참을 날아가다 보니 하늘의 끝인지 기둥 다섯개가 보입니다. 오공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곳이 끝닿은 곳이로구나. 이번에 돌아가면 여래의 보증으로 영소전 옥좌에는 내가 앉게 된다.'(올재 클래식, 서유기 1)



 



그리고 표식을 남기겠다는 생각으로 붓으로 가운데 기둥에 '제천대성, 이곳에서 노닐다'라고 쓰고 첫 기둥에 오줌을 갈깁니다. 득의양양하여 여래에게 돌아간 오공은 옥제에게 천궁을 양도 하라고 큰소리 치죠. 그러자 여래는 오공에서 자신의 손바닥에서 한 발짝도 넘어서질 못했다고 되려 호통을 칩니다. 그러자 오공이 그러죠.



 





 



여기까집니다. 결국 '부처님 손바닥'이라는 용어는 여기에서 유래가 되었었죠. 저는 그 이야기를 생각할 때마다. if. 거기서 손오공이 한 발짝만 더 나갔더라면. 아니 더 나갔으면 또 그 뒤에 뭐가 있었을까. 그래도 그냥 그거 눈 딱감고 여기까지 왔지만 조금만 더 가보자 했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두고 두고 했습니다. 어차피 바뀌지 않는 것은 생각해 보아야 의미 없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지금도 가끔 그때 생각을 해봅니다. 살다보니 그런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일전에 포스팅 한 적이 있는 '오기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폴 오스터 저/김경식 역

열린책들 | 2001년 07월




 




제리 : 은행강도 말하는 거야? 그때 그 두녀석이 길거리에서 아무데나 마구 총질을 했잖아?



오기 : 4명이 죽었지. 그 중의 하나가 폴의 마누라였어...(중략) 웃기는 건, 그 일이 있기 직전에 그 여자가 여기 들렀었다는 거야. 저 친구한테 시가를 사다 주려고.



..............



오기 : 맞아, 재수 없었지. 난 가끔 이런 생각을 해. 그여자가 큰돈을 내서 내가 거스름돈을 주느라 시간을 끌었던가 아니면 이 가게에 손님이 좀 더 많았더라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몇 초 늦게 이 가게를 나갔을 거고 그러면 아마 총알받이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그러면 그 여자는 아직 살아있을 거고, 아기가 태어났을 것고, 폴은 지금처럼 숙취에 시달리며 거리를 헤매는 대신 집에 앉아서 또 다른 책을 쓰고 있었을 거야. 




 



정말 어떤 일들은 마치 모든 사건이 최악의 결말 하나만을 위해 완벽히 조합되었다는 느낌이 들때가 있습니다. 특히 그런 생각이 괴로운 이유는 중간에 하나의 과정만 어긋났어도 적어도 그런 결과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차라리 '어쩔 수 없었다'는 생각이 들면 좋으련만 단 한번도 그런 생각으로 마무리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만약' '만약에'를 되풀이하며 자꾸 곱씹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후회는 곧잘 소설의 소재로도 이용됩니다. 어쩌면 타임리프류의 소설이 인기 있는 것 또한 인간의 '후회'하는 마음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신기하게도 '만약'이라는 생각을 할 때 저는 지금도 서유기의 그 장면이 떠오릅니다. 부처님 손바닥 끝에서 한 발만 더 나갔더라면 하고 말이죠. 우리 인생도 운명의 손바닥 위에 있지만 어쩌면 벗어나기 직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함께 하게 됩니다.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생각했을 때, 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처럼 말이죠. 우리도 여기까지구나. 여기까지 완벽히 운명의 시나리오대로였구나라고 생각할 때 한 발 더 나가는 것은 어떨까 하고 30년이 지난 지금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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