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번쯤 봐야할

더딘그리움
- 작성일
- 2023.12.17
라쇼몬
- 글쓴이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저
민음사
"저는 뭐든지 제 눈으로 본 것이 아니면 그리지를 못하옵니다. 설령 그린다 해도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야 못 그리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니옵니까?"
..........
"그러면 지옥변 병풍을 그리기 위해서는 지옥을 봐야만 하겠구먼."
"그렇사옵니다......." (p. 150)
지옥변
요시히데라는 유명한 화가가 있었다. 그는 천박하고 거만하며 기분 나쁘게 생겼지만 그림 실력만큼은 최고였다. 일부 사람들은 그의 그림에서 울음소리가 새어 나오기도 하고 죽은 사람의 그림을 그리면 시취가 난다고도 했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은 3년 안에 혼이 나가버렸지만 정작 요시히데는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애정하는 대상이 있었으니 바로 그의 딸이었다. 그녀는 호리카와 대신의 집에 시녀로 들어가 있었고 요시히데는 그에게 고용되어 그림을 그리는 처지였다. 틈만 나면 화가는 딸을 내어 달라고 부탁했지만 대신은 듣지 않는다. 어느 날 호리카와는 요시히데를 불러 '지옥변'(지옥의 모습을 그린 병풍 그림)을 그리라고 명령한다.
이 작품의 화자는 대신을 모시는 관리 정도로 보인다. 그는 일관되게 호리카와 대신의 인격과 품위를 찬양하고 세간에 들리는 소문에 대해서는 냉소적이다. 요시히데의 딸과 대신과의 관계에 대해 들리는 소문 역시 절대 그럴 리가 없는 분이라고 반박한다. 소설 구성상 어리숙한 화자를 전면에 내세우는 방식은 오히려 대신에 대한 소문이 실제라고 확신시켜주는 효과가 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채 묘사만 하는 것 같지만 모든 사건의 중심에서 진실을 전달하는 셈이다. 소설 중간에 딸이 우는 장면과 누군가로부터 도망쳐 나오는데 옷이 풀어 헤쳐진 장면이 있다. 화자는 계속 절대 그럴리 없다고 하지만 독자는 대신이 화가의 딸을 취하려고 하는 것임을 유추할 수 있다. 요시히데는 그런 이유로 자신의 딸을 빼내려고 하지만 매번 거절 당한다.
지옥변을 완성시키고 딸을 빼내고자 하는 소심한 화가지만, 그림을 그릴 때에는 완벽한 미를 위해 기이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쇠사슬에 묶여 고통스러워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제자를 묶어서 꼼짝 못하게 하거나, 부엉이를 길들여 사람을 공격하게 하고 태연히 그림을 그린다. 제자들은 그가 벌이는 끔찍한 행동보다 그 광경을 만족스런 표정으로 그리고 있는 모습에서 소름끼치는 공포를 느낀다. 이런식으로 병풍을 완성시키던 그는 결국 난관에 봉착한다. 한 가운데 빈 공간에 그릴 그림을 완성 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화가는 고민 끝에 대신을 찾아가 첫 머리에 있는 저 말을 한다. 자신은 눈으로 보아야만 그림을 그릴 수 있는데 불타는 우마차가 하늘에서 떨어지고 그 안의 귀부인이 괴로워 하는 장면을 그릴 수 없다는 것이다. 대신은 그 말을 듣더니 요란스레 웃으면 걱정말라고 준비해 준다고 한다.
공터에 놓여 있는 마차를 보는 요시히데의 표정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지만 마차의 창이 열리면서 그 안에 있는 사람이 드러나자 양팔을 들며 그쪽으로 향했다. 그 안에는 그토록 대신에게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던 딸이 있었던 것이다. 요시히데는 그쪽으로 가려 했지만 곧 제지당한 채 마차가 불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그는 공포와 비통함을 느끼면서 서서히 감정의 동요를 일으킨다. 딸을 잃게 된다는 슬픔과 고통은 작품의 완성을 눈 앞에 두고 순식간에 희미해진다. 그의 표정은 점점 황홀한 법열의 광휘를 느끼는 것처럼 변했다. 그의 표정에는 이미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엄숙함과 위엄이 있었다. 그는 이제 극한의 작품을 완성시킬 준비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결국 보름 후에 그 위대한 '지옥변'을 완성 시킨다.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하다면 먼저 유미주의 소설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봐야한다. 유미주의, 탐미주의 작품은 미를 최고의 가치로 보고 모든 것을 미의 관점으로 해석한다. 자본주의의 최상층에는 자본이 자리하고 있듯이 유미주의의 꼭대기에는 극한의 미가 존재한다. 돈이 많은 사람이 자본주의에서 최상위 포식자이듯이, 최상의 아름다움을 가진 존재가 유미주의에서는 최고 권력자이다. 당연스럽게도 요시히데는 지상 최고의 작품 '지옥변'을 완성하고 다음 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완벽한 미를 완성하기 위해서라면 요시히데에게 인간의 목숨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목숨도 딸의 목숨도 모두 비료로 쏟아 붓고 단 하나의 마스터피스라는 열매를 완성 시킨 것이다.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보면서 경외감과 동시에 공포를, 숭고함과 동시에 두려움을 느낀다. 딸이 불에 타는 모습을 볼 때, 마차 속 괴로워하는 딸을 그릴 때 그의 눈빛을 상상해보라. 그것은 슬픔도 고통도 비탄도 아닌 해탈의 경지에 다다른 노승려의 눈빛이었을 것이다. 호리카와 대신의 말이 생생하게 들리는 듯 하다. 실제 그는 그렇게 했으니까.
지옥변 병풍을 그리기 위해서는 지옥을 봐야만 하겠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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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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