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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딘그리움
- 작성일
- 2024.3.15
당신은 지나갈 수 없다
- 글쓴이
- 손홍규 저
창비
예언자
오토바이 사고를 당한 후에 노인에게는 묘한 예언 능력이 생겼다. 바로 과거의 일을 예언하는 능력이다. 예를 들면 이미 십년전에 군대에서 둘째 아들이 죽은 조카에게 예언을 한다. '자네 둘째 말여..... 군대 보내면 안 되네... 꽉 잡아야 하네.' 조카는 그 잊었던 그 아픔이 떠올라 다시 우울해진다. 하지만 노인은 그 사실을 모른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것은 예언 능력보다는 자신이 서 있는 시간대에 대한 혼돈 이라고 봐야 할것 같다. 이미 경험한 사건을 그 바로 앞 시간대로 가서 예언하는 방식이므로. 그는 자신이 어느 시간대에 서 있는 지 모른다. 그저 그의 눈에 조카의 사고가 보이기 때문에 그게 앞으로 일어날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떤 때는 잠을 자다 벌떡 일어나서 50년 전의 어느 날인 것처럼 처남에게 돈을 건네주겠다고 나서려고 한다. 그리고 노인은 부인에게 말한다.
'나 시방... 앞이 보이네.'
앞은 물리적인 시선이기도 하고 추상적인 미래이기도 하다. 한 때 그는 앞날이 어느정도 보장된 면서기였다. 하지만, 부인의 빨갱이 오빠 때문에 공무원에 잘리고 만다. 그는 부인의 오빠에게 돈을 건네며 밀항을 돕는다. 그 과정에서 노인은 돈을 절반만 건넨다. 그 일이 내내 마음에 걸렸는지 그 사실을 기억해 내고 다시 주겠다고 일어난 것이다. 노인은 큰 아들 명기가 논 팔아 달라고 온 것을 알고 있다는 말, 둘째 명호가 사람에게 배신 당할 거라는 예언을 해댔다. 물론 다 일어난 사건이지만 적어도 노인에게는 예언이었다. 그렇다고 다 아는 사실만 이야기 하는 게 아니었다. 셋째 아들 명남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던 노인이었지만 지금은 그가 살아있다고 말했다. 노인의 동창인 트럭 기사에게는 심지어 물을 조심하라고 사고를 미리 예견 하기도 한다. 그가 가진 능력은 단순히 자기의 경험을 넘어서기도 하고 미래의 사건도 볼 수 있었다. 다만, 그 자신이 어느 시간대에 속했는지를 모르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노인은 꿈을 꾸고 있다.
수백 번도 넘게 꾸었던 꿈이다. 노부인과 처음 부부의 연을 약속하고 관계를 맺던 누에밭 잠실. 그들 부부는 평생 서로에게 질문 했다. '나랑 산 거 후회하시오?' '자네는 시방도 나를 원망하는가?' 물음의 시작은 누에밭에서부터다. 자신이 가진 것을 포기하고 노부인을 택했던 과거의 시점에 그는 여전히 멈춰 있었다. 그때 그들이 연을 맺지 않았다면 어찌 됐을까. 영원히 남으로 살았으면 서로는 더 행복했을까.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어버린 사건들을 예언하던 예언자 노인은 항상 그 순간을 생각했다.
우리의 정신이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 기억은 과거의 한 순간에 정지해 버릴 지도 모른다. 그것은 고통의 기억일 수도 있고, 행복한 순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정신이 나의 통제를 벗어날 때 나는 무슨 기억을 떠올릴까. 가장 아팠거나 행복한 기억일까 아니면 조금도 의식하지 못했던 사소한 기억일까. 노인은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까지도 그들이 결혼을 앞두고 사람들 눈을 피해 만나던 시기를 기억했다. 아이가 심심할 때마다 뒷동산에 오르듯 노인은 마음이 무거울 때마다 피안의 기억으로 돌아가 그 시간을 곱씹었다. 노인의 시간은 미래와 과거, 현재가 뒤섞여 버린 시간이다. 책장의 책을 펼치듯이 어떤 시간이든 원하는 대로 갈 수 있었다. 거기에서는 과거도 미래가 되고 미래도 과거가 되고 만다. 인생을 완전히 바꿔버린 어떤 사건에 대한 기억을 예언하는 노인이라니. 생각은 꼬리를 물어 내 과거에 다다랐다. 시간을 돌릴 수도 없고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없는 마지막 순간에 나는 어떤 시간에 멈춰 있을까. 설마 마침내 나는 내 인생을 긍정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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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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