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 해외소설

생귤탱귤
- 작성일
- 2016.7.8
종점의 그 아이
- 글쓴이
- 유즈키 아사코 저
한스미디어
책을 읽는 내내 사춘기 여고생들의 섬세한 심리를 너무나 탁월하게 묘사를 하고 있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마치 나의 여고시절을 누가 엿보기나 한 것 처럼...
아주 약간의 미스테리까지 섞여 있어, 정말 호기심을 자극한다.
누구에게나 새학기는 낯선 환경과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는 설렘과 동시에 불안함을 가지게 된다. 도쿄의 유명한 미션계 사립 여학교를 다니는 아카리, 기요코, 모리 나쓰코, 교코, 야스다 사치고, 이 다섯명의 여고생들도 마찬가지 이다. 아카리를 중심으로 한 소녀들의 불안한 심리가 4편의 단편 속에 너무나 섬세하게 묘사된다.
여름방학은 기존 친구들간의 관계가 느슨해지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새로운 관계들이 맺어지는 시기이다. 소설 속 아이들에게도 고교 1학년의 첫 여름방학이 다가 왔다.
유명한 사진작가의 딸인, 무언가 독특하고 매력적인 아이 아카리의 매력에 흠뻑 매료되어 버렸던 기요코는 첫 여름방학, 아카리의 집에 초대되어 들뜬 마음으로 놀러 간다. 그러나, 그녀의 일기장을 훔쳐 본 이후 충격에 빠지게 되고 개학 이후, 반 아이들과 함께 아카리를 따돌리기 시작한다.
다른 아이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어서 남자친구를 사귀는 것을 목표로 금지된 아르바이트를 몰래 하는 모리 나쓰코,
우연히 도서관에서 만나 누구보다 친한 사이가 되었지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더욱 좋아하는 야스다와 야스다와의 지난 여름의 추억을 밀어내 버리고 원래의 자신이 속한 그룹으로 돌아간 교코.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며, 복잡한 관계 속에 혼란스러운 첫 여름방학은 그렇게 지나가고 아이들은 한뼘씩 성장해 나간다.
결말은 찐한 감동이나, 허를 찌르는 반전이 있거나 하지 않는다. 일본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자주 만나서 이제는 너무나 익숙한 따뜻하고 잔잔한 결말이다. 아이들의 내적 성장을 느끼며 씽긋 웃는 정도라고나 할까.
스토리 자체 보다는 아이들의 심리를 묘사한 문장 하나하나가 너무나 사실적으로 다가와서 읽는 맛이 좋았던 것 같다.
소설 속에서 사춘기 여고생들의 심리를 정말 잘 표현했다고 생각되는 문장들을 뽑아봤다. 사실 너무나 많아서 고르기가 힘들 정도였다. ^^
포겟 미, 낫 블루 - 독특한 매력을 가진 아이, 아카리와 그런 그녀를 동경했던 기요코
"학교 안 올 때는 어디서 뭐 하는데?"
(중략)
“급행 타고 에노시마 바다를 보러 가. 그리고 평일의 사람 없는 모래사장에서 어슬렁거려. 일렁이는 파도만 바라봐도 얼마나 자유로운 기분이 드는데. 정말 재밌어.”
기요코는 그런 아카리에게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 학교를 빠지고 바다를 보러 간다니. 그 말이 아름다운 음악이나 보석의 이름처럼 들렸다.
- 26쪽
다른 아이들이 아카리 험담을 할 때마다 기요코는 아카리에게 쌓였던 분노가 조금씩 사그라지는 것을 느꼈다. 마음이 정화 되고, 그녀를 알기 전의 건전하고 착한 여자애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기요코는 아카리 때리기에는 참가하지 않고, 험담을 이끌어내고는 듣고만 있는 것이 좋았다.
- 59쪽
딱히 아카리가 미운 것은 아니었다. 반성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고서야 의문이 생겼다.
그녀는 왜 반성을 해야 하는 것일까?
(중략)
아카리는 자신의 일기를 모두가 읽었다는 것조차 모른다.
아카리는 반성 따위 할 리가 없다. 기요코는 이제야 깨달았다. 기요코를 비롯한 반 아이들의 말없는 따돌림은 논리에 어긋난 것이었다. 아카리 같은 여자애는 논리가 맞지 않는, 더구나 지금 같은 소리 없는 주장 따위는 평생 상대하지 않을 것이다.
- 72쪽
'그래 맞아. 나는 계속 이러고 싶었어.'
왜 그 여름, 아카리가 보는 앞에서 이렇게 일기를 찢어발기지 못했을까? 이 일기를 좍좍 찢어서 아카리에게 내던지고 울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때 몰래 읽은 것이 드러났다면, 무섭고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했을 테고, 게다가 말 잘하는 그녀에게 반론도 해야 했겠지만, 문제가 이렇게 복잡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기를 본인 앞에서 찢는 것과 이렇게 칼로 찢어서 책상에 올려놓는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얘기이다. 사실은 인격의 존엄을 걸고 아카리와 정면으로 맞붙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 73쪽
아카리는 그저 웅크린 채 소리 없이 울었다.
눈물을 주륵주륵 흘리자 반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기요코는 지난 몇 달 동안 무거운 납덩어리를 묶고 있던 끈이 뚝 끊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됐다, 하고 생각했다. 마침내 아카리가 평범한 여자가 되었다. 이제 우리들과 똑같다. 앞으로는 그 숨 막히는 무시 공격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녀를 용서해 주자.
-74쪽
아카리는 기요코를 용서했을까.
아니다, 그렇게 너그러운 아이일 리가 없다. 언제나 그랬듯이 조금 변덕스러운 것이리라. 그 무렵에는 그 변덕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는 상처 받곤 했다.
정말 바보 같아서 자기도 모르게 키득 웃고 말았다.
-90쪽
여름귤 - 다른 아이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고픈, 모리 나쓰코
여름 사이에 변신하자.
기말시험 공부를 하던 중 나쓰코는 불쑥 그렇게 결심했다. 반 아이들 아무도 경험한 적 없는 대모험을 하면서 2학기가 되기 전에 어른스러운 여자로 변신하는 거다.
(중략)
그 결과, 여름방학에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했다. 남자와 얘기할 수도 있고, 배짱도 키울 수 있다. 어쩌면 남친이 생길지 모른다. 이 정도로 과감하게 도전하지 않으면 다른 아이들과 차별화가 안된다.
- 100쪽
눈을 들어 보니, 마주 보이는 좌석에 앉은 회사원인 듯한 두 여자가 조잘거리고 있었다. (중략) 매끄럽고 긴 머리에 매니큐어를 칠한 손톱. 스타킹에 감싸인 호리호리한 허벅지, 부러질 듯 가느다란 하이힐. 나쓰코는 멍하는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걸렸을까. 자기 힘으로 귀엽고 값비싼 케이크를 살 수 있는 아름다운 여자드. 저렇게 어른이 되면 친구를 시샘하거나 깔보는 일도 없어질까.
- 142쪽
둘이 있는데, 말없이 독서 -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야스다와 지난 여름의 추억을 밀어내버린 교코
반 아이들이 전부 어린애처럼 보였다. 중등부에서 올라온 아이들은 보나마나 남자와 말 한 마디 나눠본 적 없을 테고, 같은 그룹 아이들도 괜히 어른스럽게 굴 뿐이지 실제로는 처녀일 것이다.
교문 앞에서 다쿠야의 차에 올라탈 때 기분은 그야말로 최고였다. 동급생과 선배의 질투와 동경이 뒤섞인 그 시선.
-158쪽
기분이 영 안 좋았다. 대체 뭐라고 야스다는 그런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일까. 친구들 때문에 자신의 가치를 깎아먹고 있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계획이 있다.
2학기가 될 때까지 야스다를 변신시키는 것이다. 교코 그룹의 일원까지는 될 수 없어도, 어떤 그룹이든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게 지위를 끌어롤리고 싶다. 반 아이들이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게 하고 싶다.
기타시나가와의 단골 미용실에 데리고 가 머리와 눈썹을 정리하고, 교복을 예쁘게 입고 머리 손질하는 방법과 화장 기술도 철저하게 가르칠 것이다. 등도 꼿꼿하게 펴고 말투도 조심하게 한다면, 그렇게만 해도 많이 달라질 것이다.
8월 하순의 개학날까지는 어떻게든 바꿔주고 싶다.
모두가 그녀를 인정하게 되면 공개적으로 친하게 디낼 수 있다. 그럼 2학기가 얼마나 즐거울까.
- 188~189쪽
사실은 변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아이들 앞에서, 지금 모습 그대로의 그녀와 친하게 지낼 수 없는 것은 교코 자신의 문제다. 좀 더 당당하고 싶다. 왜 자신은 야스다처럼 되지 못하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자, 견딜 수가 없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잡풀들의 숨이 턱 막히는 저 냄새, 남자 냄새하고 똑같아! 너는 처녀라서 아직 모르겠지만."
그렇게 소리치고는 현관으로 쏜살같이 뛰어갔다. 야스다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자신의 몸에서야말고 시큼하고 텁텁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아, 도망치듯이 자전거를 몰았다.
- 190쪽
소중한 친구들을 교코와 비교하는 것은 천박하고 비열한 짓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날씬한 다리와 곱게 손질한 긴 머리칼을 얻뜻언뜻 떠올리고 있다. 교코는 분석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지식을 자랑하지도 않는다. 그저 좋은 것은 좋다, 싫은 것은 싫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그런 점이 좋았다. (중략)
한숨이 나왔다. 매력적인 아이라고는 생각하지만, 그녀를 붙잡아 두기 위해 변할 마음은 조금도 없다. 그랬다가는 자신과 이 친구들을 싫어하게 될 것이다.
- 192쪽
교코가 자신을 떠밀어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란 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너무 가까워지지 않도록 나름 조심했다.
눈물이 똑, 샴페인 베이지색 손톱으로 떨어진다. 교코가 칠해준 후로 그냥 내버려두고 있다. 매니큐어를 어떻게 지우는지 모른다.
최소한 9월까지라도 친하게 지내고 싶었다. 너도밤나무 열매를 주머니에서 꺼내 쳐다보았다. 마음먹고 입에 넣었다. 씁쓰름하고 풋내가 났다. 얼굴을 찡그리고 이내 화장지에 뱉어냈다. 침 붇은 열매가 번들번들 빛났다. 혹시, 남자에게서 이런 맛이 나는 걸까. 불쑥 그녀가 한 말이 떠올라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나 같은 여자에게도 언젠가 그 맛을 알 날이 올까.
-206쪽
오이스터 베이비 - 비로소 본인의 문제를 깨우친 아카리
불현듯 한 광경이 되 살아났다.
화창한 아침이었다. 여고생인 아카리는 이 역에서 같은 반의 한 소녀에게 바다로 가자고 부추겼다.
'오늘 학교 가지 말자. 땡땡이치자'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더라. 결국 바다에는 갔던가. 그 애 이름이 뭐였더라. 시마네처럼 눈부시게 이쪽을 올려다보았던 여자아이.
(중략)
히죽거리며 문에 기대 그때였다.
불쑥 그 여자아이의 이름이 떠올랐다.
다치바나 기요코.
그녀와 친하게 지낸 적도 있었지, 아마. 기억이 떠오르자, 갑자기 등줄기가 써늘해졌다.
- 232쪽
- 좋아요
- 6
- 댓글
- 0
- 작성일
- 2023.04.26
댓글 0
댓글이 없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