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
  1. 오늘의 세계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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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네이버캐스트 http://navercast.naver.com/worldcelebrity/history/228


 


 


 

















NBA 리그 일정을 한 달쯤 남겨둔 1995년 3월 중순, 전 미국, 아니 전 세계를 흥분시킬 한 가지 소식이 전해진다. 은퇴한 ‘농구의 황제’, 아니 ‘농구의 신’ 마이클 조던이 복귀한다는 것이었다. “돌아왔다”(I'm back)는 그의 짧은 한 마디는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일종의 유행어가 되었다.



 


 



















그의 복귀는 17개월 전에 있었던 은퇴만큼이나 갑작스럽고도 충격적이었다. 다만 그때와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면 팬들은 실망과 아쉬움 때문이 아니라, 기쁨과 기대감 때문에 함성을 질렀다는 것이었다. 복귀 발표 바로 다음날인 1995년 3월 19일, 시카고 불스는 인디애나 페이서스와 경기를 치른다. 오랜만에 다시 코트에 선 조던은 이날 경기에 백 넘버 45번을 달고 나왔다. 원래 백 넘버였던 그 유명한 23번은 그의 은퇴 직후에 영구 결번되었기 때문이다(훗날 조던은 “옛날 같지 않다”는 상대팀 선수의 혹평에, 징계를 무릅쓰면서까지 45번 대신 다시 23번을 달고 나섰다).


 


조던은 이날 경기에서 19점을 기록하지만, 팀은 연장전 끝에 103대 96으로 패하고 말았다. 기대가 너무 컸던 까닭일까, 사람들은 조던이 은퇴 이전의 기량을 회복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던은 얼마 뒤인 3월 28일에 뉴욕 매디슨스퀘어가든에서 열린 뉴욕 닉스와의 경기에서 무려 55득점을 쏟아 부으며 세간의 우려를 보기 좋게 일축해 버린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으리라. 조던의 은퇴 직후부터 하락세를 면치 못했던 시카고 불스는 조던이 컴백한 이후 1996, 1997, 1998년에 또다시 3연속 우승이라는 기록을 남기게 된다. 물론 농구는 스타 플레이어 혼자만이 뛰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가 없었다면 불스가 다시 한 번 정상의 고지에 오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으리라.


 


 












마이클 조던은 1963년 2월 17일에 뉴욕 주 브루클린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에 부모를 따라 노스캐롤라이나 주 윌밍턴으로 이사한 이래 줄곧 그곳에서 자랐다. 엠슬리 A. 래니 고등학교 시절, 그는 농구 팀에서 한 차례 ‘짤리는’ 수모를 경험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곧 뛰어난 기량을 선보이며 주목을 받았고,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채플힐 캠퍼스에 농구 장학금을 받고 입학한다. 1984년 NBA 신인 드래프트에서 그는 시카고 불스에 입단한다. 


 


이후 조던의 활약상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데뷔 첫해부터 그는 탁월한 기량을 선보이며 줄곧 승승장구했다. “하느님이 조던으로 가장하고 나타났다.” 1986년 플레이오프에서 보스턴 셀틱스를 맞이해 혼자 63점을 기록하며 활약했을 때, 셀틱스의 래리 버드가 한 유명한 말이다. 하지만 그의 전설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필 잭슨이 수석코치로 취임하고, 스코티 피펜과의 환상적인 조합이 무르익은 1990/91년 시즌부터였다. 조던의 주도 하에 시카고 불스는 LA 레이커스를 꺾고 1991년에 최초로 NBA 정상에 등극한다. 이후 불스는 1992년과 1993년까지 3연속으로 NBA 우승을 차지한다.


 


하지만 농구선수로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그 순간, 조던에게는 치명적인 오점을 남긴 스캔들이 터지고 만다. 거액의 골프 도박에 연루되었다는 증거가 드러났던 것이다. 최고의 실력뿐 아니라 모범적인 사생활로도 주목을 받았던 조던에게는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실제로 조던은 여느 선수들과는 달리 농구 경기가 시작되고 끝날 때마다 항상 양복 정장을 갖춰 입고 경기장에 드나드는 것으로 유명했고, 문신이나 술이나 마약 같은 구설수에 오를 만한 일을 철저히 회피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는 결국 공개 사과로 잘못을 시인해야만 했다.


 


 














도박 스캔들이 어느 정도 잠잠해졌을 무렵, 이번에는 어이없는 비극이 벌어진다. 시카고 불스가 세 번째 NBA 우승을 달성한 직후인 1993년 7월 23일, 조던에게는 그 누구보다도 더 강력한 후원자였던 아버지 제임스 조던이 강도에게 피살되어 며칠 후에 유기된 시신으로 발견된 것이다. 이 일이 그가 정상의 자리에서 문득 환멸감을 느끼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으리라는 것이 세간의 추측이다. 1993년 10월 6일, 조던은 은퇴를 공식 발표한다. NBA에서 활약한 지 10년이 채 못 된 상황이었고, 말 그대로 정상에서 물러나는 셈이었다.


 


이듬해 봄인 1994년 3월 31일, 조던은 농구가 아닌 야구로 복귀했다. 시카고 화이트삭스에 입단해 마이너리그에서 뛰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고, 언론은 연신 ‘농구 천재’가 ‘야구 둔재’로 몰락한 것을 야유하기 바빴다. 왜 하필 야구선수였을까?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것은 안타깝게 사망한 조던의 아버지가 평생 이루지 못한 꿈이었던 동시에, 조던 본인의 어린 시절부터의 꿈이었다고 한다. 어쩌면 이미 농구의 정상에 오른 그로선 뭔가 승부욕을 불태운 또 다른 대상이 필요했을지 모른다(약간의 의구심이 들기도 하지만). 심지어 어떤 사람은 그가 도박에 관심을 갖은 것 역시 승부욕의 발현이라고 생각하니까.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조던은 1995년에 다시 농구 코트로 돌아온다. 그리고 1996~98년 동안 불스의 3연속 NBA 우승이라는 또 다른 기록을 달성한다. 은퇴를 번복하지 않았더라도 그는 이미 ‘전설적인’ 농구선수였다. 그러나 은퇴를 번복함으로써 그는 바야흐로 ‘신화적인’ 농구선수가 되었다. 만약 그가 절정의 기량을 과시하던 순간 갑작스럽게 은퇴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점은, 그런 은퇴와 복귀, 그리고 정상 재탈환이라는 극적 순간들이 있기 때문에 마이클 조던의 위업이 더욱 돋보인다는 사실이다.


 



 











마이클 조던은 1999년에 두 번째 은퇴를 발표했고, 이듬해에는 2000년에 이르러 선수가 아닌 워싱턴 위저즈의 공동 구단주가 되어 나타난다. 하지만 농구를 향한 열정만큼은 여간해서 포기할 수가 없었던 것일까. 2001년부터 그는 다시 위저즈의 선수로 뛰면서 불혹을 넘긴 나이에도 뛰어난 기량을 과시했다. 2003년 2월 21일, 조던은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비록 두 번이나 은퇴를 번복하고 선수로 복귀했지만, 이제 그가 다시 코트로 돌아올 일은 없을 것이다. 그는 현재 취미인 골프를 즐기며, 식당 및 자선사업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는 것으로 알려졌다.


 


 












스포츠나 연예 분야에서 활약한 인물의 경우, 한때는 누구보다도 강력한 명성과 영향력을 누리지만, 어느 순간이 지나면 금세 대중의 뇌리에서 잊혀지는 것도 사실이다. 반면 마이클 조던은 그야말로 ‘전 지구적인’ 인기를 누린 명사였다. 그의 전성기에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오지를 방문한 미국인들은 현지인들로부터 종종 “마이클 조던의 안부”에 관해 질문을 받고 당황하곤 했다. NBA는 물론이고 세계 스포츠계에서 조던에 버금가는 위업을 남긴 스타들은 이전이나 이후에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가 누린 것과 같은 어마어마한 인기를 경험하진 못한 것만 같다. 어째서일까? 


 


 


 











여기에 관해서는 약간 ‘삐딱한’ 시선도 일리가 있다. 가령 미국의 역사학자인 월터 레이피버는 조던의 어마어마한 인기가 미국계 다국적기업 및 미디어의 전 세계적인 확장, 즉 지구 자본주의의 득세와 맥을 같이 했다고 지적한다. 물론 조던이 뛰어난 농구선수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으리라. 그가 세계적인 명사가 된 것은, 어디까지나 거대 자본이 연출한 미디어의 만화경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조던과 나이키의 밀착관계는 오늘날 스타와 자본의 결합이 어떤 방식으로, 또 어디까지 가능한지를 흥미롭게 보여준다.


 


가령 조던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미국 농구 ‘드림 팀’ 대표로 출전했지만, 대표팀의 유니폼 재킷을 입지 않겠다고(찰스 바클리를 비롯한 몇몇 동료들과 함께) 발표함으로써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이유는 엉뚱하게도 대표팀의 유니폼을 제작한 리복 사가 그의 스폰서인 나이키 사의 라이벌이라는 데에 있었다. 이 사실을 놓고 여론이 비등하자, 조던은 금메달 시상식에서 결국 유니폼을 입기는 하되, 어깨에 미국 국기를 걸치고 나와서 가슴에 새겨진 리복 사의 마크를 가려 버리는 석연찮은 타협책을 선보인다.


 


 












조던과 나이키의 최고 히트작 ‘에어 조던’의 경우, 한때 미국 내에서는 사회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다. 고가에 판매되는 이 운동화를 갖고 싶었던 가난한 10대 흑인 소년들이 마약이나 불법 행위에 손을 대면서까지 돈을 벌거나, 심지어 다른 소년을 죽이고 운동화를 뺏는 일까지 생겼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 고가의 운동화가 실제로는 동남아시아의 저개발국에서 저임금 노동자들(심지어 죄수들)의 노동력에 의해 염가로 생산되어 미국 시장에서 비싼 값에 팔린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논란은 더욱 비등했다.


 


















봅 그린은 ‘에어 조던’ 운동화 때문에 10대들이 심지어 서로를 죽인 사건을 언급하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조던에게 묻는다. 그러자 조던은 “목숨까지 버리면서 내 옷을 입어야 할 필요는 없다.” “만약 내 이름 때문에 그런 사건이 일어났다면, 기꺼이 내 이름을 빼도록 하겠다” 등등의 대답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후로 그의 광고 출연이 중단되지는 않았다. 물론 조던 본인도 적잖이 당혹스럽긴 했던 모양이다. “나는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나의 생계수단의 하나입니다. 내가 어릴 때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에요. 정말 모르겠어요.” 조던은 분명히 선의로 한 말이었을 것이다.


 


그는 어디까지나 실력으로 성공한 인물이다. 따라서 그에게 사회 문제에 대한 책임까지 고스란히 떠안길 수는 없으리라. 하지만 그를 이용한 상업주의에는 과도한 면이 없지 않았다. 월터 레이피버의 말마따나, 문제는 조던의 이기심이나 무감각이 아니라, 상업적 요구와 사회적 요구가 충돌할 때마다 십중팔구는 상업적 요구가 승리했다는 데에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조던이라는 농구 스타만의 딜레마가 아니었다. 오히려 오늘날 위기에 처한 지구 자본주의 자체가 직면한 딜레마이기도 했다.


 











여기서 문득 지금도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한 가지 소문이 떠오른다. 경찰이 조던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두 명의 10대 용의자를 체포하던 당시, 그 중 한 소년은 그 즈음 한창 인기 있었던 ‘마이클 조던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23번 백넘버가 달린 그 유명한 불스 유니폼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농구공을 든 채 공중으로 솟구치던 그 유명한 ‘점프맨’의 로고가 달린 옷이었던 것일까? 혹시 그들 역시 다른 10대들과 마찬가지로 ‘에어 조던’을 비롯한 갖가지 선망의 물품들을 살 돈이 필요했던 것이었을까? 물론 헛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당시 조던의 인기를 생각해 보면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더욱 섬뜩한 것이다.



“이것은 나를 정말 슬프게 합니다. 모든 것이 바뀌고 있어요.” 마이클 조던은 봅 그린과의 인터뷰에서 ‘에어 조던’을 얻기 위해 살인도 불사하는 10대들의 풍조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인터뷰 당시인 1992년에야 스캔들도, 비극도, 그리고 갑작스런 은퇴와 화려한 복귀도 아직은 먼 훗날의 일에 불과했건만, 그 역시 자신의 이름을 내건 과도한 상업주의의 대두에 관해서는 뭔가 석연찮음을 어렴풋이나마 느꼈던 까닭일까.


 


 













마이클 조던의 전성기에도 우리나라에는 그에 관한 책이 그다지 많이 나온 것은 아니었다. 봅 그린의 <덩크슛! 마이클 조던(Hang Time)>(한인성 옮김, 에디터, 1994)은 조던과 절친한 시카고의 저널리스트가 쓴 전기인데, 1992년도 NBA 우승 때까지의 이야기만 수록되어 있다. 그린은 조던의 이후 이야기를 <리바운드(Rebound)>라는 속편으로 쓰기도 했는데 아쉽게도 우리나라에는 소개되지 않았다. 얼핏 보기에는 조던에 대한 예찬 위주일 것 같지만 의외로 날카로운 지적이나 질문도 숨어 있으며, 무엇보다도 조던의 인간적인 면모를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의 증언이라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책이다.





마이클 조던, 나이키, 지구자본주의성공 프로젝트, 마이클 조던 되기

 











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마이클 조던과 나이키는 세계화 시대의 아이콘으로서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월터 레이피버의 <마이클 조던, 나이키, 지구자본주의>(이정엽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1)는 미국 외교사를 전공한 역사학자가 이런 특이한 현상에 관해 분석한 책이다. 겉보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사회과학서적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쉽고 재미있으며, NBA와 조던의 이력에 관해서도 짧지만 비교적 잘 요약해 놓아서 도움이 된다.


 


NBA 올랜도 매직 구단의 임원이었던 팻 윌리엄스가 저널리스트 마이클 웨인랩과 공저한 <성공 프로젝트, 마이클 조던 되기>(김경숙 옮김, 해냄, 2002)는 조던에 관한 몇 안 되는 책 가운데 하나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그의 ‘성공 비결’에만 초점을 맞춘 자기계발 실용서라는 한계를 뚜렷이 지니고 있다. 다만 조던에 관한 몇 가지 일화라든지, 또는 다른 선수들의 평가 같은 자잘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은 나름의 미덕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마이클 조던이라는 뛰어난 농구선수를 이해하기 위한 최선의 수단은 ‘책’보다는 오히려 ‘경기 동영상’이 아닐까 싶다. 마이클 조던 동영상 검색을 해보면 그의 주요 경기 및 여러 종류의 편집 동영상을 무수히 찾을 수 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은 바로 이럴 때에 쓰는 것이 아닐까.


 


 



덧붙인 정보 이어보기ㅣ 네이버 스포츠 <매거진S>의 커버스토리: ‘정글을 삼킨 독사’ 눈물, 집념, 열정의 이름 마이클 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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