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
  1. 오늘의 세계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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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네이버캐스트 http://navercast.naver.com/worldcelebrity/history/241


 


 



















한마디 말이 천둥이 될 수 있다. 그 말을 세계가 공유할 때, 그것은 그 말을 한 사람의 것만은 아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가 그렇고, 패트릭 헨리의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가 그렇다. 세계인의 귀에 깊숙이 박힌 이 말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이자 방향이 되었다. 한마디 말이 우리 가슴에 불을 댕기는 번개가 될 수 있다.

 


 











영국의 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한 탄압이 강경해지자 아메리카 혁명 세력의 저항 또한 거세지고 있었다. 혁명 세력은 식민정부의 무력에 대항할 민병대를 조직하기로 했다. 1775년 3월 23일, 버지니아 주 리치먼드의 세인트존 교회. 버지니아 식민지 협의회는 이곳에서 민병대를 조직하기 위한 중대한 모임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식민 정부의 방해를 피하기 위해 주도인 윌리엄스버그가 아닌 리치먼드에 모였다. 여러 사람이 발언했지만 의견이 분분하여 뜻이 모아지지 않고 있었다. 그때 한 신사가 나섰다. 쩌렁쩌렁 울리는 신사의 목소리에 주위는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의장님, 사태를 완화시키려는 것은 이제 헛된 일입니다. 여러분은 평화, 평화를 거듭 외치고 있지만, 평화는 없습니다. 전쟁은 실제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다음에 북쪽에서 불어올 강풍은 우리의 귀에 무기가 맞부딪치는 소리를 들려줄 것입니다! 우리의 형제들은 이미 전장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한가하게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겁니까? 여러분이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가진 것은 무엇입니까? 쇠사슬을 차고 노예가 되어가고 있는데도, 목숨이 그리도 소중하고, 평화가 그리도 달콤하단 말입니까? 전능하신 신이시여, 길을 인도해주십시오. 여러분들이 어떤 길을 선택할지 모르지만, 나는 이렇게 외칩니다. ‘내게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숨소리도 들리지 않던 좌중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나오면서 “무장하자! 무장하자!”라는 외침이 들려왔다. 이 신사는 바로 미국 독립투쟁 시기의 전설적인 웅변가 패트릭 헨리였다. 온건파 세력은 무장 충돌을 피하려 했지만, 헨리는 민병대를 모집하고 전쟁준비를 갖추어야 한다는 결의안을 제출했었다. 그 결의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그는 자신의 빛나는 연설 경력 사상 가장 유명한 열변을 토했던 것이다.


 










헨리의 연설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받았다는 사실은 전해지지만 실제로 연설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았다. 1805년 윌리엄 워트라는 변호사는 패트릭 헨리에 관한 전기를 쓰기로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주지사를 두 번이나 역임한 패트릭 헨리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유명한 연설에 대한 채록도 없었다. 워트는 수소문 끝에 세인트 조지 터커 판사에게 패트릭 헨리의 연설 내용을 전달받을 수 있었다. 한때 미국 학생들이 외우기까지 했던 명연설문은 이렇게 한 목격자의 기억과 전기작가의 상상력에 의존하여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연설문이 많은 부분 정확하지 않은 기억과 상상력에 의해 채워졌다고 해도, 그 핵심에 해당하는 명구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가 주는 교훈은 잊을 수 없는 것이며,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패트릭 헨리는 1736년 5월 29일 버지니아의 해노버 군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존 헨리는 1720년대 스코틀랜드에서 버지니아 식민지로 이주한 지식인이었다. 지방학교에서 몇 년 동안 초등교육을 받은 패트릭 헨리는 이후 아버지 밑에서 공부했다. 교육을 많이 받지 않았지만 그는 매우 명민했고, 특히 언변이 뛰어나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특별한 재주가 있었다.


 


20대 중반까지 헨리의 삶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상업에 뛰어들어 실패한 후 1754년 새러 셸턴과 혼인했다. 새러 셸턴과의 사이에는 여섯 명의 자식을 두게 된다. 그의 장인은 혼인 선물로 노예들과 300에이커의 농장을 주었다. 헨리는 농장주가 되어 열심히 일했지만, 1757년 화재로 인해 많은 재산을 잃게 된다. 또 한번의 사업에 실패한 그는 사업을 접고 독학으로 법률공부를 했다. 어쩌면 젊은 시절의 실패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것인지 모른다. 운명의 여신이 우리에게 실패를 딛고 일어설 것인지, 아니면 주저앉을 것인지를 물어보는 것이다. 헨리는 실패를 딛고 일어서는 길을 택했다. 변호사가 되자 그의 뛰어난 말솜씨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변호사로서 헨리의 능력은 1763년 ‘사제의 소송’(Parson's Cause)으로 알려진 소송사건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헨리가 영국의 왕권에 대항하는 급진적 혁명가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2년 후에 있었던 연설 덕분이다. 1765년 그는 버지니아 식민지 의회에 하원의원으로 진출하였다. 영국이 세입을 증대하기 위해 식민지에 대해 이른바 인지세법(Stamp Act)을 제정한 직후였다. 인지세법은 식민지의 상업 및 법률 서류, 신문, 팸플릿, 카드, 달력, 주사위 등에 직접세를 부과하는 법이었다. 이 법으로 인해 식민지 주민들은 커다란 고통을 짊어질 수밖에 없었다. 버지니아 의회에서 인지세법에 대한 논란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이때 하원의원 헨리가 나섰다. 그의 목소리는 천둥과도 같았고 표정은 사자와도 같았다. 그는 외쳤다. “카이사르에게는 브루투스가 있었고 찰스 1세에게는 크롬웰이 있었습니다. 조지 3세 역시……” 여기까지 얘기했을 때 의장이 “반역이다!”라고 외쳤다. 의사당 곳곳에서도 “반역이다!”라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차, 너무 깊게 들어왔구나, 헨리는 순간적으로 당황했지만, 끝까지 침착성을 잃지 않았다. “조지 3세는 역사의 교훈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이 말이 반역이라면, 여러분 마음대로 하십시오.” 헨리가 급진적인 독립투사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이후 헨리는 10년 동안 영국 정부와 식민 정책에 가장 강력하게 맞선 급진적 지도자로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1774년 9월 12일 조지아 주를 제외한 아메리카의 각 식민지 대표가 필라델피아에 모였다. 이것이 아메리카 혁명의 불꽃을 피우게 되는 제1차 대륙회의(Continental Congress)였다. 이 대륙회의에 모인 55명의 대표 중에는 미국 독립의 일등공신인 새뮤얼 애덤스, 존 애덤스, 존 제이, 조지 워싱턴, 그리고 패트릭 헨리 등이 있었다. 그들은 영국에 대한 아메리카인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영국에 어떻게 저항할 것인지를 논의했다.


 


각 지역의 식민지 협의회는 민병대를 조직하여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무력을 불사하겠다는 태도를 분명히 했다. 버지니아에서도 헨리의 열렬한 호소에 힘입어 민병대가 조직되었다. 영국 의회는 아메리카 식민지인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판단하고 군대를 보냈다. 1775년 4월 19일, 렉싱턴콩코드에서 전투가 벌어지면서 아메리카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대륙회의는 13개 식민지에서 헌법을 제정하여 정부를 세우기로 했다. 아메리카 독립을 위해 인상적인 활동을 펼친 헨리는 1776년 버지니아 주지사가 되어 3년 동안 재임하면서 독립전쟁에 이바지했다. 독립에 대한 확신이 서면서 대륙회의의 대표들은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1776년 7월 4일 공식 발표하였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식민지 내에서의 일이었지만, 오랜 전쟁 끝에 1783년 9월 3일 파리조약에 의해 미국의 독립이 국제적으로 확인되는 계기가 되었다.


 


 


 











애초에 헨리는 연방정부보다는 개인의 권리와 버지니아 주의 권익을 먼저 생각했다. 1784년부터 1786년까지 헨리는 다시 한번 버지니아 주지사가 되어 봉사했지만, 연방정부 설립에는 그리 협조적이지 않았다. 그는 1787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헌위원회의 참석을 거부했다. 미국이 독립을 선언했다고 하지만, 그것으로 각 주의 이해관계가 조정된 것은 아니었다. 헨리는 1788년 버지니아 협의회에서 연방헌법 비준에 반대하는 세력을 이끌었다. 헨리가 연방헌법에 반대한 이유는 북부가 미시시피 항행권을 스페인에게 넘겨줄지도 모른다는 의혹과, 연방헌법의 초안이 주(州)의 권리 및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고 있지 않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자신이 앞장서서 주장한 권리장전 조항이 통과된 후에야 헨리는 연방정부와 화해했다. 그러나 조지 워싱턴과 존 애덤스 대통령이 몇 차례 관직을 제안했을 때에는 가정 문제와 건강 문제를 이유로 거절했다.


 


헨리는 젊은 시절 사업에 실패한 적도 있고 첫 번째 아내가 일찍 죽었지만, 비교적 유복한 삶을 누렸다. 1777년 헨리는 두 번째 아내 도로테아 댄드리지와 혼인하여 11명의 아이를 낳았다. 이렇게 많은 자식들을 양육할 수 있었다면 충분히 복된 인생을 살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생애의 말년을 가족과 함께 레드 힐이라고 불리는 큰 농장에서 보냈다. 헨리는 말년을 조용히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이 위대한 웅변가의 능력을 마지막으로 발휘할 기회가 또 주어졌다. 각 주가 연방입법의 합헌성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져야 한다는 켄터키-버지니아 결의안에 반대하기 위해 1799년 주의원 후보로 출마하는 데 동의한 것이다. 유세장에서 그는 미국의 단합을 감동적으로 호소함으로써 주의원에 당선되었는데, 그것이 최후의 연설이 되고 말았다. 1799년 6월 6일 그는 위암으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갔다. 실로 그는 미국 독립혁명의 한복판에서 한 마리 사자처럼 포효했으나, 병마의 힘 앞에서는 천둥 같은 목소리도 어쩔 수 없었다.


 


 












아메리카의 독립투사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영국과 싸웠던 이유는 무엇일까? 영국에서 건너온 사람이 많은 만큼 그들은 고국을 배반한 셈이다. 그러나 새로운 땅에 온 이상 그들에게는 자유가 필요했다. 먼 곳에서 원격조정으로 자신들의 수족을 부리는 것은 치욕이었던 것이다. 토마스 페인 같은 경우는 세습 왕정을 부정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와 평등을 내세워 아메리카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였고, 그의 주장은 신대륙에서 크게 환영 받았다. 헨리는 새뮤얼 애덤스와 토마스 페인과 더불어 미국 독립과 공화제를 위해 가장 영향력 있고 급진적인 주장을 펼친 사람이었다. 특히 정부의 부패와 타락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으며, 그에 맞서 개인의 권리를 주장하였다. 요컨대 아메리카 독립투사들의 싸움은 봉건적인 왕정에서 민주적인 공화정으로 가는 역사적 발전을 위한 필연적인 노정이었다. 패트릭 헨리의 연설은 그 싸움의 정당성에 대한 가장 감동적인 호소였다. 아직도 그의 연설문이 미국의 주요 교과서에 등장하는 이유이다.


 


역사에 대한 평가는 세상이 변하면서 바뀔 수도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헨리의 영웅적인 연설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의혹은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헨리의 연설문이 실제의 것이 아니라는 데 있었다. 또 헨리가 민병대를 조직하자고 외쳤던 것은 인디언과 노예들의 반란이 두려웠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헨리는 실제로 제법 많은 노예를 거느린 농장주였다. 그는 1만 에이커의 농장에서 75명의 노예를 데리고 담배를 재배했다. 1778년 버지니아 주지사로서 그는 인디언 영토를 습격하는 데 1개 중대의 병력을 지원했다. 이듬해에는 백인 지배에 저항하는 체로키족의 치카모가 부족이 사는 곳까지 군사 원정을 허락했다. 헨리는 자신을 비롯한 상류층 백인들의 이익을 위해 투쟁했을 뿐 진정한 인권을 위해 투쟁한 것은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미국의 독립 자체가 모든 사람의 인권을 위한 혁명은 아니었다. 미국 독립투사들이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조물주로부터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 받았다”라고 선언할 때, 그 모든 사람에는 흑인과 인디언 등 유색인은 빠져 있었던 것이다.


 


1775년 3월 23일 헨리가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토해냈다고 전해지는 연설문이 그가 말한 그대로라고 믿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다. 그러나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는 말이 주는 교훈은 이미 헨리만의 것이 아니다. 이 말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바로 우리의 마음이 끊임없이 자유를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가 아니면 차라리 죽음을 달라고, 노예로 안락하게 사는 것보다는 힘들더라도 자유인으로 사는 것이 행복하다고 우리 모두의 가슴속 정열이 소리 높여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한편으로 그 누구의 자유도 함부로 억압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한마디 말이 폭풍이 될 수도 있다.


 


 














미국의 역사를 다룬 책 중에 라이 라파엘의 <미국의 탄생>(남경태 옮김, 그린비, 2005)은 다소 충격적이다. 미국 건국에 이런 의미가 있었나? 그렇다. 그의 견해는 경청할 만하다. 그는 미국의 독립전쟁을 혁명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면도 있다고 말한다. 영국의 왕정으로부터 독립하여 새로운 정부를 수립한 혁명이기도 하지만, 그 혁명전쟁은 정복전쟁이기도 했던 것이다. 실로 미국의 독립혁명은 미국 역사상 가장 대규모로 벌어진 인디언 전쟁이었다.








 

미국의 탄생세계를 뒤흔든 독립선언서










저자는 패트릭 헨리의 유명한 연설에 대해서도 그것이 어떻게 신화화되었는지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패트릭 헨리의 이야기를 포함하여 이 책은 미국인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영웅적인 일화들의 권위를 벗겨내었다. 그렇다고 미국이라는 나라의 권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 책이 역사적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스테파니 슈워츠 드라이버의 <세계를 뒤흔든 독립선언서>(안효상 옮김, 그린비, 2005)를 함께 읽으면 미국의 독립운동사를 더 균형 있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라이 라파엘이 미국 독립의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켰지만, 그것이 세계 역사에 기여한 점도 무시할 수 없다. 미국 독립정신이 인권을 상식으로 만든 면이 분명히 있으며, 정치체제로서 왕정이 아닌 근대 공화정의 시범을 보였다는 점에서 새로운 독립국가의 모델이 되었다. 이 책은 미국 독립선언이 세계 역사의 방향을 돌려놓은 일대 사건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미국 독립선언서가 만들어진 배경으로부터 연방헌법이 탄생할 때까지 미국 독립의 역사를 시간순으로 정리하면서 그 드라마틱한 역사적 사건의 현장들을 입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오늘의 세계인물> 관련글 이어보기ㅣ1863년 1월 1일, 노예 해방을 선언한 에이브러햄 링컨


                                                1776년 1월 10일 미국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한 <상식>을 출간한 토마스 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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