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창룡 시집
무아
- 공개여부
- 작성일
- 2008.5.9
또 떠날 때가 되었다
새벽, 아득한 곳으로부터 점차 가까워지는 새의 노래가 그날의 일기를 말해준다. 어제는 비가 왔었는데 지금은 갰구나. 다닥다닥 붙은 흑석동의 주택들 사이를 비집고 올라온 나무 위에서 새 몇 마리가 하는 말이다. 이제 며칠이면 안녕이라고. 또 한 집이 떠났다. 재개발 직전의 흑석동에 빈집이 늘고 있다.
나의 행복은 가끔 불행으로 변신하기도 하지만, 괜찮다. 나의 불행 또한 행복으로 변신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긴 애벌레 시절을 지나 꼼짝 없이 죽어 지내야 했던 번데기 시절을 거쳐 나비가 탄생하듯이, 행복은 그렇게 변신하는 것이고, 불행도 그렇게 변신하는 것이다. 나의 행복도 나비가 되었고, 나의 불행도 나비가 되었다. 나비만 되면 어디든 훨훨 날아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나는 여전히 흑석동의 재개발지역을 배회하고 있지만, 괜찮다.
네 번째 시집을 정리하고 보니 이번 시집이 첫 번째 시집의 세계와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첫 시집의 시들이 내 태생으로 형성된 날것의 현실이었다면, 이번 시집의 시들은 세상을 배우기 위해 길을 떠난 청년이 방황을 마치고 돌아와서 맞이하는 ‘삶은’(익혀진) 현실이다. 끝없이 걸었지만 사실상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음에도 이 출발선상에서 커다란 안도감을 느끼는 것은, 기실 길을 잃고 헤매다 마침내 집에 돌아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사랑을 노래할 수 있을 듯하다. 세계는 아름다운 면도 있고 아름답지 않은 면도 있지만, 바람직하지도 바람직하지 않지도 않지만, 어리석지도 어리석지 않지도 않지만, 비판받아 마땅하고 저주받아 마땅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통틀어서 사랑받아 마땅하다.
앞집과 뒷집의 지붕이 뚫렸다. 마지막 세입자가 그 집과의 인연을 끝내자, 재개발조합은 집 없는 사람들이 들어와 살지 못하도록 벽과 지붕을 부숴버렸다. 또 이사할 때가 되었다. 나비는 옥상에 올라가 지친 날개를 접고 한강과 남산과 인왕산과 북악산과 북한산과 보이지 않는 모든 강과 산을 오래 바라보았다.
세상과 나 자신을 발견하게 해준 여행의 동반자에게 이 시집을 바친다.
2008년 봄
재개발되는 흑석동에서
차창룡
고시원은 괜찮아요
차창룡 저 | 창비 | 2008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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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