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이후니
  1. 그 등대 안의 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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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이후니, 제 닉네임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하시니 이쯤에서 그 비밀을 공개하도록 해야겠네요.


'오탁번' 이라는 시인이자 소설가가 있습니다.


1966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로,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로, 1969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소설로 각각 당선한 화려한 문단 데뷔 경력을 지니고 있는 분이지요. 그러나 그 동안 낸 작품집은 그리 많지 않고 그것도 그리 큰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제 아내가 고려대학교를 다닐 때, 그 분은 국어교육학과 교수로 있었는데(지금도 아마 계실겁니다) 아내는 이 분의 <시창작론>을 수강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도 오탁번이라는 이름을 알게 되었고 그의 시집이 나오는 대로 사서 읽었지요. 그런데 그 분의 시집들은 모두 그렇게 제 마음에 쏙 드는 시집들은 아니더군요. 그중에서 1985년에 출간된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라는 시집이 그래도 개중 낫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탁번이 부러웠습니다. 세 번씩이나 신춘문예에 당선했다는 사실도 부러웠지만, 사실 제 부러움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이 분의 부인인 '김은자' 역시 시인이라는 사실 때문이었지요. 그들은 부부 시인이었던 것입니다!


시인을 아내로 두고, 그 아내와 함께 부부 공동시집을 내는 것이 당시의 제 꿈이었는데, 오탁번-김은자 부부는 바로 그 완벽한 모델처럼 보여졌습니다.


특히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라는 시집에 실린 오탁번 시인의 초기 시편들 중에서 <굴뚝 消除夫>를 읽으면서 저는 그런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되었지요.


한번 읽어볼까요?


 


굴뚝 消除夫


 


수은주의 키가 만년필 촉만큼 작아진 오전 여덟시


씽그의 드라마를 읽으려고 가다가 그를 만났다.


나는 目禮를 했다.


그는 녹슨 북을 두드리며 지나갔다.


 


나는 걸어가는 게 아니라 자꾸 내 앞을 가로막는


서울의 祭基洞의 겨울 안개를 헤집으며 나아갔다.


개천의 시멘트 다리를 건너며


북을 치는 그를 생각해 보았다.


그냥 무심히


내 말을 잘 안들어 화가 나는 그녀를 생각하듯


그냥 무심히


 


은이후니.


 


비극을 알리는 海風이 문을 흔들고


버트레이가 죽고 그의 老母가 울고


막이 내린다. 씽그는 만년필을 놓는다.


강의실 창 밖에 겨울 안개가 내리고


아침에 만난 그를 잠깐 생각하다가


코오피 집에 가는 오후약속을 상기했다.


 


말을 타고 바다로 내달리는


슬픈 사람들,


우리는 에리제에서 코오피를 마셨다.


코오피잔을 저으며 슬프고 가난한 시간 속으로 내달려 갔다.


아침의 그를 문득 생각해 보았다.


 


은이후니.


 


집으로 돌아오다가 석탄처럼 검은 빛


그를 다시 만났다.


길고 깊은 암흑을 파내어


아침부터 밤까지 골목을 내달리는


그에게 나는 目禮를 했다.


 


내 전신에 쌓인 암흑의 기류를 파낼


그녀를 생각하며


나는 대문을 두드렸다.


은이후니


겨울저녁의 안개를 모호한 우리의 어둠을 두드렸다.


 


(청하시선 13, 오탁번 시집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에서)


 


아침과 밤, 출퇴근길에 우연히 만난 굴뚝소제부를 통하여 자신의 내면에 쌓인 어둠을 맑게 걷어내줄 아내를 떠올리고 있는 시인의 마음이 '은이후니' 라는 뜻을 알지 못하는 낱말에 의하여 따스하게 공명되고 있지요.


 


그처럼 나도 시인인 아내를 둔다면, 겨울저녁의 안개처럼 모호한 내 삶 속에 깃든 어둠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나 역시 그녀의 어둠을 덜어내줄 굴뚝 소제부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요.


지금은 제 아내가 된 그녀와 저는 서로 주고받는 편지와 엽서에 '안녕'이라는 말 대신에 '은이후니'라는 말을 언제부터인가부터 쓰기 시작했고, 데이트하고 헤어질 때도 '안녕'이라는 말을 '은이후니'라는 말로 대신했지요. 그건 우리의 소망이 담긴 말이었습니다. 그들처럼 함께 시인이 되자고, 그들처럼 부부 시인이 되자고. 


그런데 그녀는 '은이후니'라는 말의 본래 뜻이 궁금해서 어느 날 오탁번 교수에게 물어보았더군요. 그랬더니 대답은 안해주고 그냥 빙그레 웃기만 했다더군요. 그러니 그 정확한 뜻은 사실 아내도 저도 아직 모르는 셈입니다. 그저 오탁번 시인의 아내 이름인 '김은자'와 연관된 어떤 약어가 아닐까 하는 것이 제 추측입니다.


 


그러나 아무려면 어떻겠어요! 이제 '은이후니'는 우리만의 은어가 됐으니 우리가 의미를 붙이기 나름이지요.


'은이후니'는 이제 시인이 되기보다는 시인을 살기를 원하는 제 아내와 아직도 시인의 꿈을 버리지 못해서 시를 끄적거리고 있는 제가 꾸는 꿈의 이름인 셈입니다. 한편으로는 나보다 훨씬 섬세하고 뛰어난 시인이기도 한 제 아내에게 제가 붙여준 별칭이기도 하구요.


아내처럼 저 역시 시인이 되기보다는 시인으로 살아야 될 텐데, 아직 미련과 욕심이 남아서인지 그게 잘 안 되는군요. 아내처럼 정말로 시로 살아가는 시인이 되기 위하여 요즘도 저는 나즈막히 소리내어 발음하곤 합니다.


 


은이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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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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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이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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