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필과 노트
은이후니
- 공개여부
- 작성일
- 2004.11.9
집 안 밖 식구들 다 잠들고
나는 지붕으로 간다
참 많은 식구들 언덕으로 올라오는 동안
나는 몰래 내다 넌 속옷을 걷고 지붕 아래
나의 방으로 올라간다
그들이 저녁식탁에서 잠깐 나의 안부를
물을 뿐 지붕 바로 아래 나의 방은
아무도 방문하지 않는다
창문에 걸어두었던 이불을 나무침대에 깔고
나는 깨끗한 속옷을 입고 밤이 오기를 엎드려
기다린다 자전거가 달려가며 땅의 낮은 데서
뽀얀 먼지를 일으킨다 멀리서 텅 빈 학교 운동장에도
어둠이 들어서고 강의 얼굴은 아직 황금빛이다
발전소 불빛이 제일 먼저 들어오고 나는 안심하고
문을 연다 지붕으로 나 있는
하늘을 열고 나는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우선
말을 해본다
그리고 어제 강물의 이마에 꽂았던 빨간 깃발을
따라 멀리로 내려간다 아무에게도 나의 병을
전하지 않으려고 나는 강의 가운데로 내려간다
발전소 불빛도 나를 따라오다 지치고 손을 들면
산의 허리가 닿는다 여기서 나는 환자 불치의
병의 주인이 아니어도 된다 나는 물을 사랑해
나의 방에서 사랑하는 물은 안타까워
별이 손을 내려 자정임을 알려준다 나는
물과의 입맞춤을 마친다
식구들 잠의 맨 아래 잠들어 있고
나는 지붕으로 뛰어오른다 왜 식구들은 나를 내다 버리거나
아침 우유 속에 독약을 넣어주지 않을까
한낮에는 살고 싶지 않아 창문을 담요로 닫고
강물 흐르는 소리와 죽은 피가 몸의 구석에서
정신의 구석까지 몰려다니는 소리를 섞으며
나는 저녁이 오기를 기다려
말을 하고 싶은데 말이 전혀 필요치 않으니
밤에 나는 떠 있어 왜냐하면
말할 수 없는 힘으로 나는 날아다닐 수 있거든
약을 먹을 시간이야 피가 맑아졌으면 얼마나 좋을까
잠자는 식구들을 깨워 손뼉치며 노래하고
내 나이가 몇인지 알아보고 키도 재보고
풍금을 배우고 싶어
문틈으로 나는 많은 것을 보아왔거든
참 많은 식구들이 식구들끼리 울고불고 아
잠 못 들고
나는 지붕으로 난 문을 열고
어두운 시간의 문을 열고 날아간다
나는 환자 기억이 오늘이 되기도 하고
오늘이 내일로 엇갈리는 피가 우울한 병의 주인
발전소가 환하게 강을 지키기 시작하는 저녁
나는 언덕을 내려가 말을 배우고 돌아와
내 병의 말로 바꾸어버린다
오늘도 몇 개의 말을 배우고
내 우울한 피로 노래부르고 싶어하지만
참 많은 식구들은 너무 일찍 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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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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