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필과 노트
은이후니
- 공개여부
- 작성일
- 2006.2.27
1.
나는 내 인생에 넓은 여백을 갖기를 원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월든>에서)
공백을 여백으로 돌릴 수 있는 힘이 생길 때 다시 떠날 생각이다. (신대철, <나무 위의 동네>에서)
2.
여백(餘白)과 공백(空白)은 사전적 정의로는 동의어로 묶일 수 있지만, 그 말뜻을 깊이 음미해보면 오히려 반의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여백은 '채우고도 남아 있는 빈자리'인 반면 공백은 '채우지 못해서 비어 있는 자리'이다. 즉 '빈자리'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그 비어있는 공간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가 여백과 공백을 구분하게 만드는 것이다.
여백의 빈 공간은 이미 차 있는 공간과 더불어 조화롭게 존재하는 긍정적인 공간이지만 공백의 빈 공간은 빈틈이 없게 꽉 채워져서 사라져야만 하는 부정적인 공간이다. 그래서 여백은 채우고 나서도 살아남는다. 아니 채우고 나서야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반면에 공백은 채우고 나면 즉시 사라지고 만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공백은 채우고 나면 그 즉시 더 큰 공백이 나타나서 입을 벌린다. 공백은 밑 빠진 독처럼 채워지지 않으며 화수분처럼 만족을 모른다.
마음속에 여백을 지닌 사람은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한 자신의 학력조차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지만 마음속에 공백을 지닌 사람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박사학위를 땄어도 도무지 만족할 줄 모른다. 여백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단칸방 셋방살이도 기쁨이요 행복의 보금자리이지만 공백에 사로잡힌 사람은 초호화 펜트하우스조차도 불안과 불행의 소굴에 불과할 뿐이다. 여백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에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음을 기뻐하지만 공백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의 온갖 스포트라이트를 받고도 아직도 어둡다고 말한다. 여백의 빈 공간은 밝고 환하지만 공백의 빈 공간은 캄캄하고 어둡기 때문이다.
여백의 빛은 채워진 나머지 공간이 아주 작을지라도 구석구석 환하게 비추어 그 풍성함을 드러내지만, 공백의 어둠 앞에서는 채워진 나머지 공간이 제아무리 크더라도 그 머리카락 한 올조차도 드러나지 못한다. 즉 여백은 삶이지만 공백은 죽음인 것이다.
3.
보름 정도 글 한 줄 쓰지 않고 지냈다. 말하자면 공백기였던 셈인데, 돌아보니 아주 깜깜하지만은 않아 보인다. 공백을 여백으로 돌릴 수 있는 힘이 내게 생기려면 아직도 멀었지만, 내 인생에 넓은 여백을 가지려면 아직도 더 기다려야 하겠지만, 이쯤해서 다시 시작해 보는 것도 좋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여름이 끝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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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