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작가

라온윤
- 작성일
- 2022.9.12
종이 위의 산책자
- 글쓴이
- 양철주 저
구름의시간
“때론 삶은 꿈을 찾는 시간이 아닌 꿀 한 방울을 찾는 시간일 때가 많다”
<종이 위의 산책자>
추석 연휴를 무료하게 보내긴 싫었고, 두꺼운 책은 시작하기도 전에 질려버릴까 싶어 고심하던 중, 3일간 정독하기 딱 좋은 책을 만났다. 무언가를 잊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집중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던 중 우연인지 필연인지, 오후 네시에 거실창으로 스미는 햇살처럼 따스한 책 ‘종이 위의 산책자’를 만났다.
‘종이 위의 산책자’는 ‘구름의 시간’ 출판사에서 나온 첫 에세이집인데 표지에 ‘나와 잘 지내는 시간 01’ 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니, 아마 ‘나와 잘 지내는 시간’시리즈로 다양한 책이 출간 예정인 듯 하다. 관계의 풍요속, 자아의 빈곤이라 생각되는 요즘에 좋은 친구가 되어줄 것 같다. ‘종이 위의 산책자’만큼만 만들어 진다면 말이다.
책의 서문에 양철주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이야기했던가. 나는 강을 따라 걷거나 숲으로 길을 떠나는 대신 글과 문장 속으로 산책을 간다고, 그런 취미를 가지고 있다고, 그러다가는 아예 주저앉아 그 글을 베껴 쓰기 시작한다고.’ 서문부터 나를 확 끌어당기는 기분이었다. 요근래 필사를 하는 이유와 기분을 그대로 작가님께서 글로 옮겨 놓았으니, 많은 부분을 공감을 하며 읽을 수 있었다. 물론 짧은 시를 필사하는 나와는 필사량부터 차이가 난다.
완독하기도 힘들다는 프루스트의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2015년부터 새로운 번역본이 나오는 현재 2022년 8권(민음사판)까지 진행되고 있다. 6권까지 필사하는데 13개월이 필요했다고 하니 왠만한 사람은 벌써 포기했을 꽤 긴 시간을 필사한 셈이다. 그 외 명문장으로 가득한 ‘모비 딕’을 꼬박 7개월에 걸려하였고, 그외에도 완필한 책이 릴케의 ‘말테의 수기’, 카뮈의 ‘결혼,여름’ 등 13종에 이르니 엄청난 필사량이라 하겠다. 릴케와 장그리니에, 헤세와 카뮈를 특히 사랑하시는 듯하다. 작가는 그러한 필사를 통해 무엇을 느꼈고 무엇을 우리에게 말하기 위해 이 책을 내었을까. 여러편의 에세이가 모두 필사에 대한 내용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필사에 대한 애정과 그 외 필사의 배경으로 힐링을 주는 음악, 유년시절의 추억담도 만날 수 있다. 아주 오래전 같은 추억을 공유한 얌전하고 지혜로운 친구를 만나는 느낌이다.
필사를 시작하려는 분들이나 필사를 하고 있는 분들게 추천하고픈 책이다. 필사를 통해 만날 수 있는 기쁨과 깨달음이 두런두런, 따스하게 채워져 있다. 책을 덮을 즈음엔 스산한 새벽공기에 따스한 이불을 끌어당겨 포옥 덮은 기분이다.
<책속으로>
P6(들어서며)
____문장은 살아 있는 생명체도 아닌 것이 영락없이 사람과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중략)...책은 집에 있어도 문장은 우리 가슴과 함께한다. 그 문장은 음악이 되고, 철학이 된다. 문장은, 때로 우리의 심장이 된다. 소중한 문장을 마음에 품은 사람은, 그러므로 두 개의 심장으로 산다.
P33
____단지 더 잘 기억하기 위해서라면 책을 여러 번 읽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필사는 기억 이상의 것, 그 너머를 바라보는 행위아다. 필사는 텍스트의 음미 속도를 늦춘다. ... (중략)...칡뿌리를 씹는 것은 그 즙으로 인해 배부르고자 함이 아니라 즙을 음미하고, 씹는 행위를 즐기는 것이다....필사는 무엇을 창조하려 함이 아닌 작품의 곱씹음 혹은 작가에 대한 사랑 고백이다.
P95
____더 오랜 시간이 지나 책은 잊혀져도 밑줄은 남고 그 밑줄에서 하나의 책이 태어날 수도 있다. 밑줄은 다시 여기로 돌아오겠다는 약속 같은 것. 다시 돌아와서 확인하는, 나를 기다렸다는 듯 빛나고 있는 불빛 하나와 같다. 바람이 불어도 훌치지 않는, 가슴 깊은 곳에 가라앉은 밑줄은 동굴의 울림을 갖는다.
P133
____카뮈는 하나의 주제만을 가지고 에세이를 썼는데 그것은 ‘진실’이며, 달리 말하면 진실 아닌 것과의 투쟁이다. 진실은 지속되는 것, 썩는 것이며, 신화나 시같은 것이 아니며, 죽음 이전의 것들이며,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철저하게 현세주의자의 면모를 고집한다. 그는 취하지 않고 쾌락을 맛보는 사람이다.
P143
____어린 시절에도 죽음의 그림자는 늘 어른거렸고, 우리는 슬픈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났다. 시간이 지나갔다고 해서, 어느 한 시절을 벗어났다고 해서, 사랑이 끝났다고 해서 그때의 간절함과 열정이 부정되지 않기를. 그 시절의 간절함 속에서 우리는 가장 뜨거웠다. 지금은 그때와 너무 다른 열정 혹은 빙하기를 통과하는 중이라 해도.
P147
____필사가 즐거운 이유는 아름답고 힘이 되는 문장을 내것으로 만든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P201(나가며)
____돌아가신 우리 할머니 부치댕이댁이 늘 하시던 말씀 하나, 콩나물 시루에 물을 부으면 물은 조르르 흘러내려 남은 게 없는 것 같지만 콩나물은 무럭무럭 잘 자란다는 이야기. 나의 손과 눈과 시간을 통과해 간 문장들이 그저 의미 없고 허무하게 흘러가지 않았으리라 믿는다.
*<책키라웃과 구름의시간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종이위의산책자 #양철주 #구름의시간 #필사에관한책 #책추천 #북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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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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