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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kim419
- 작성일
- 2021.12.31
불편하지만 사는 데 지장 없습니다
- 글쓴이
- 백순심 저
설렘(SEOLREM)
장애인과 이야기를 나눌 때 '비장애인'이라는 용어를 쓴다. 예전에 비하해서 사용하는 용어 대신 시각장애인, 언어장애인, 청각장애인, 지체장애인, 지적장애인과 같은 말로 바꿨다. '결정 장애' 대신 '우유부단', '벙어리장갑' 대신 '손 모아 장갑'이라고 한다.
이 책의 작가는 평균연령이 40~50대인 장애인 시설에서 일하는, 뇌병변 장애를 갖고 태어난 장애인이다. 결혼한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하다. <불편하지만 사는 데 지장 없습니다>는 비장애인들과 똑같은 하나의 인격체로, 같은 하늘에서 그들과 어울려 사는 세상을 꿈꾸는, 그런 바람이 담긴 장애인의 이야기다.
일일 장애인 체험으로 그들을 이해한다고 생각하나? 잘못된 생각이다. 비장애인들이 전혀 상상하지도 아니 상상할 수도 없는 차별과 모욕을 장애인들은 감내하며 산다. 비장애인들은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어린 작가를 앞에 두고 주변 사람들은 심한 말을 서슴지 않고 한다. 마치 장애인은 못 알아듣는다는 듯이.
작가는 어린 시절 깍두기였다. 이편도 저편도 아닌 양쪽 편이 다 되는. 친구들은 그나마 놀이에 깍두기로 끼워줘서 배려했지만 그에게는 차별이다.
선생님은 반 아이들에게 훈계용으로 작가를 이용한다. "순심이는 장애가 있어도 열심히 하는데 너희들은 뭐하니?"라고 말하며.
'장애인 특별전형'을 하는 대학교는 '장애인 도우미 제도'도 운영하지 않고 경사로도 없다.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된 '모든 국민에게 교육받을 권리'를 무시한다.
'장애인 우대'라고 채용공고를 내고 '정상에 가까운 장애인'이 아니면 뽑지 않는다. '우리는 장애인을 채용하려 했는데 적격자가 없었다'라는 보여주기식이다.
사람들은 '장애인이 결혼해서 아이 낳고 잘 살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한다. 인격체로 보지 않는다.
장애인의 자녀들도 삐딱하게 본다.
작가와 같이 손을 떠는 장애인은 패스트푸드 점의 키오스크를 이용할 때 애를 먹어 포기한다.
비장애인들은 언제나 탈 수 있는 지하철이 어떤 장애인에게는 '타보고 싶은 꿈'이다.
심지어 어떤 비장애인은 장애인이 성기가 없는 줄 안다.
비장애인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장애인에게는 간절함이다. 비장애인은 장애인을 당연히 '을'로 여기며 갑질을 일삼는다. 장애인이 엄청나게 노력해서 얻은 '익숙함'이 비장애인에게는 어설프기 그지없을 뿐이다.
''장애'는 신체적, 정신적인 기능이 제한되어 고칠 수 있는 병이 아니다. 약물이나 재활을 통해 조금은 호전될 수는 있지만, 완치되지는 않는다. (p. 57)'
이런 사정을 모르고 보행이 불편한 장애인에게 자꾸 걸어보라고, 노력해 보라고 그럴싸하게 강요한다. 비장애인의 기준으로 모든 걸 마련해놓고 장애인에게 그 시스템에 맞춰 살라고 한다.
''극복'은 대체 무엇일까? 자신의 나약함을 마주할 때 '이제는 아무렇지 않아요'가 극복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 '극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p. 74)'
''장애는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40년이 걸렸습니다. (p. 191)'
작가의 말을 귀 기울여 보면 장애인이라고 늘 불행하지는 않다. 놀림의 대상이던 시절에는 '장애인들만 모여 사는 섬'에서 살고 싶었고, 비장애인의 삶이 부러워 단 하루 만이라도 비장애인으로 살고 싶었다.
하지만 작가는 이제 자신의 장애를, 자신의 불편을 인정하고 '주체적인 온전한 나'로 살고자 한다. 장애인이나 비장애인이나 자신을 사랑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삶이 행복할 수도 불행할 수도 있다. 사람마다 행복의 기준이 다른 법이다. 작가는 장애인인 자신을 끔찍이도 사랑한다. 불편은 느끼지만 사는 데 지장은 없어한다.
이 책의 작가는 평균연령이 40~50대인 장애인 시설에서 일하는, 뇌병변 장애를 갖고 태어난 장애인이다. 결혼한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하다. <불편하지만 사는 데 지장 없습니다>는 비장애인들과 똑같은 하나의 인격체로, 같은 하늘에서 그들과 어울려 사는 세상을 꿈꾸는, 그런 바람이 담긴 장애인의 이야기다.
일일 장애인 체험으로 그들을 이해한다고 생각하나? 잘못된 생각이다. 비장애인들이 전혀 상상하지도 아니 상상할 수도 없는 차별과 모욕을 장애인들은 감내하며 산다. 비장애인들은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어린 작가를 앞에 두고 주변 사람들은 심한 말을 서슴지 않고 한다. 마치 장애인은 못 알아듣는다는 듯이.
작가는 어린 시절 깍두기였다. 이편도 저편도 아닌 양쪽 편이 다 되는. 친구들은 그나마 놀이에 깍두기로 끼워줘서 배려했지만 그에게는 차별이다.
선생님은 반 아이들에게 훈계용으로 작가를 이용한다. "순심이는 장애가 있어도 열심히 하는데 너희들은 뭐하니?"라고 말하며.
'장애인 특별전형'을 하는 대학교는 '장애인 도우미 제도'도 운영하지 않고 경사로도 없다.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된 '모든 국민에게 교육받을 권리'를 무시한다.
'장애인 우대'라고 채용공고를 내고 '정상에 가까운 장애인'이 아니면 뽑지 않는다. '우리는 장애인을 채용하려 했는데 적격자가 없었다'라는 보여주기식이다.
사람들은 '장애인이 결혼해서 아이 낳고 잘 살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한다. 인격체로 보지 않는다.
장애인의 자녀들도 삐딱하게 본다.
작가와 같이 손을 떠는 장애인은 패스트푸드 점의 키오스크를 이용할 때 애를 먹어 포기한다.
비장애인들은 언제나 탈 수 있는 지하철이 어떤 장애인에게는 '타보고 싶은 꿈'이다.
심지어 어떤 비장애인은 장애인이 성기가 없는 줄 안다.
비장애인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장애인에게는 간절함이다. 비장애인은 장애인을 당연히 '을'로 여기며 갑질을 일삼는다. 장애인이 엄청나게 노력해서 얻은 '익숙함'이 비장애인에게는 어설프기 그지없을 뿐이다.
''장애'는 신체적, 정신적인 기능이 제한되어 고칠 수 있는 병이 아니다. 약물이나 재활을 통해 조금은 호전될 수는 있지만, 완치되지는 않는다. (p. 57)'
이런 사정을 모르고 보행이 불편한 장애인에게 자꾸 걸어보라고, 노력해 보라고 그럴싸하게 강요한다. 비장애인의 기준으로 모든 걸 마련해놓고 장애인에게 그 시스템에 맞춰 살라고 한다.
''극복'은 대체 무엇일까? 자신의 나약함을 마주할 때 '이제는 아무렇지 않아요'가 극복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 '극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p. 74)'
''장애는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40년이 걸렸습니다. (p. 191)'
작가의 말을 귀 기울여 보면 장애인이라고 늘 불행하지는 않다. 놀림의 대상이던 시절에는 '장애인들만 모여 사는 섬'에서 살고 싶었고, 비장애인의 삶이 부러워 단 하루 만이라도 비장애인으로 살고 싶었다.
하지만 작가는 이제 자신의 장애를, 자신의 불편을 인정하고 '주체적인 온전한 나'로 살고자 한다. 장애인이나 비장애인이나 자신을 사랑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삶이 행복할 수도 불행할 수도 있다. 사람마다 행복의 기준이 다른 법이다. 작가는 장애인인 자신을 끔찍이도 사랑한다. 불편은 느끼지만 사는 데 지장은 없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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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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