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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크리스트
글쓴이
프리드리히 니체 저
아카넷
평균
별점8.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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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크리스트>는 <우상의 황혼>과 쌍둥이 작품이라 할 수 있다(<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 69쪽). 이 책에서 니체는 ‘데카당스’로서의 기독교를 비판한다. 그리스도교는 예술을 부패시키는 주범이자 현대의 도덕과 세계관과 형이상학의 공통된 뿌리로, 노예 근성을 지닌 인간들의 반란을 불러일으키고 민주적인 평준화의 길을 닦는 주범으로 공격당한다. 그리스도교는 삶을 부정하고, 긍정하는 충동을 억압하는 데카당스 현대성의 전형인 셈이다(위의 책, 70쪽).





이 책 서문에서 니체는 “이 책은 극소수를 위한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 책은 단지 그리스도교만에만 국한하지 않고 현대 세계의 가치 전체, 즉 현대의 도덕, 철학, 정치(정의, 인간 평등, 민주주의 등)이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것으로 파악하고 비판한다. 그래서 니체에게 그리스도교의 극복이 곧 ‘모든 가치의 전도가 되는 것’이다. 이 책에서 니체는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는 비판을 하지만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리스도교는 허무적 종교이고, 그리스도 신은 힘에의 의지의 무기력 상태나 ‘보편성’을 획득한 ‘선한’ 신의 등장이라고 반박하는 반면,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한 복음을 전하는 자라고 긍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예수는 사랑하며 사는 삶이 참된 삶이자 영원한 삶이라는 복음, 신과 인간 사이를 멀어지게 했던 ‘죄’의 무효화를 선언하는 복음을 전하는 자로 이해된다. 분노하지도 않고, 벌도 내리지 않고, 저항도 하지 않으며, 자신이 살아오고 자신이 가르친 바를 몸소 실천한 존재인 예수, 바로 이런 실천만을 인류에게 남겨 놓은 예수. 이런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유일한 그리스도교인이라고 니체는 생각한다. 십자가에서 죽은 이 유일무이한 그리스도교인을 니체는 긍정적 의미에서 아이 같은 존재로, 문화로부터 떨어져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백치(Idiot)같은 존재로 여긴다(위의 책, 72-3쪽).





니체는 이 책에서 예수를 원한 감정을 넘어선 자유와 초탈의 복음, 복음주의적 평등, 사랑하는 삶이라는 복음, 복음의 실천을 통한 내면의 구원을 설교하는 존재이자 이런 복음을 삶으로 실천하는 존재로 이해한다. 그리고 이런 예수의 복음만이 진정한 기쁜 소식이며, 이런 예수가 진정한 구세주라고 생각한다. 이런 이유에서 예수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교성을 제시하는 존재이며, 역사상 유일했던 그리스도교인이라고 평가한다. 그런데 이런 예수상이 교회와 사제 집단에 의해 전혀 다른 구세주 유형으로 왜곡된다. 복음적 평등 권리 대신에 단 하나의 신과 단 하나의 신의 아들이라는 것, 사랑을 통한 구원 대신에 신앙을 통한 구원, 불멸에 대한 믿음, 부활과 심판에 대한 종말론적 교리 등이 구세주 유형에 도입된다. 더군다나 교회라는 것은 예수가 진정 원치 않았던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교 창시자인 예수가 전혀 원하지 않았던 것으로 변질되어 버린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교성은 상실되어버리고, 신의 죽음은 바로 이런 그리스도교성의 상실에 기인한다. … 사제 집단이 권리 추구 성향으로 인해 구세주 유형을 왜곡하고 교회라는 조직을 건설한 것이다. 사제들은 그들 자신이 가치를 설정하는 권력의 주체이고자 한다. 따라서 신에 대한 복종을 권고하면서 사실은 자신들에 대한 복종을 강요하는 것이다(위의 책, 269-70쪽).





“그리스도교 신 개념 - 병자의 신으로서의 신, 거미로서의 신, 정신으로서의 신 - 이것은 지상에 실현되었던 것 중에서 가장 부패한 신 개념 중 하나다; 더 나아가 그것은 신-유형의 하향적 전개에 있어 바닥 수위를 나타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신이 삶에 대한 미화이자 삶에 대한 영원한 긍정이 되는 대신, 삶에 대한 반박으로 변질되어버리다니! 신 안에서 삶과 자연과 삶에의 의지에 대한 적대가 선언되고 있다니! ‘이 세상’에 대한 온갖 비방의 공식이자 ‘저 세상’에 대한 온갖 거짓 공식이 신이라니! 신 안에서 무가 신격화되고, 무에의 의지가 신성시되다니!”(위의 책, 271쪽).





<안티크리스트>에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결정적인 섬멸 공격이 감행된다. 그 공격의 전략은 1) 그리스도교 역사 이전의 소크라테스-플라톤주의라는 철학적 전통과 그리스도교를 결합시켜, 그리스도교의 ‘대중을 위한 플라톤주의’라는 측면을 부각시킨다. 그리고 2) 이스라엘 민족의 신에서 그리스도교 신으로의 발전적 전개는 진보가 아니라 퇴보라는 것, 3) 그리스도교 신 개념은 무에의 의지이자 부패된 개념이라는 것, 4) 바울이 행한 그리스도교 역사의 창조와 제도의 정비는 그리스도교 신 자체를 왜곡시켜버린 해석의 역사라는 것, 5) 그리스도교는 바울적 유대주의, 아우구스티누스의 플라톤주의, 구제 신앙에 대한 신비적 예식, 금욕주의라는 네 가지 사유의 복합체라는 것, 6) 이 사유 복합체가 그리스도교를 지배한다는 것 등을 분석해낸다. 이 분석 작업이 끝난 후에 니체는 그리스도교가 그리스도교의 창시자인 예수가 원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 되어버렸고, 그리스도교 교회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부패 중의 최고의 부패이며, 궁극적이지만 실제로도 가능한 부패에의 의지를 갖고 있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위의 책, 272-73쪽).





“선(Gut)이란 무엇인가? ? 그것은 힘의 감정을, 힘에의 의지를, 힘 자체를 고양시키는 모든 것이다. 악(Schlecht)이란 무엇인가? ? 약함에서 비롯되는 모든 것을 말한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 힘이 증가되고 있다는 느낌, 저항을 초극했다는 느낌을 말한다.” (<안티크리스트> 2절)





니체에게 선은 힘에의 의지, 힘 자체를 고양시키는 것인 반면, 악은 약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행복이란 힘이 증가하는 느낌이다. 모든 사람은 행복을 원하는데, 이는 힘의 고양이며, 가장 큰 힘은 자기를 극복하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기를 극복한 사람, 곧 위버멘쉬다(레지날드 J. 홀딩데일, <니체: 그의 삶과 철학>, 295쪽).





“인류는 오늘날 우리가 믿고 있는 것처럼 보다 낫거나 보다 강하거나 보다 높은 상태를 향해서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진보’란 단지 하나의 근대적 관념, 곧 하나의 그릇된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 역사의 전개가 반드시 인간의 고양과 상승 그리고 강화로 나타나는 것은 아닌 것이다. … 그러한 사례들에서 보다 높은 전형이 ? 인류 전체에 비해 보면 일종의 초인과 같은 존재가 실제로 출현하고 있다.”(4절)





“그리스도교는 이렇게 더 높은 인간형에 대해서 필사적인 싸움을 벌여왔으며 이러한 인간 유형의 모든 근본 충동을 추방해버렸고, 이러한 충동들을 증류하여 악으로 만들어버렸으며 [그러한 충동을 갖는 자들을] 악인으로 만들어버렸다.”(5절)





“순수정신이란 순전히 거짓말이다”(8절).





“모든 싸움, 자신이 싸우고 있다는 모든 느낌의 반대가 복음서에서는 본능이 되었다. 저항할 능력을 갖지 않는 것이 복음서에서는 도덕이 되었고(‘악에 저항하지 말라!는 것이 복음서의 가장 심원한 말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복음서를 이해하는 관건이다), 평화에, 온유함에, 적의를 가질 수 없음에 깃들어 있는 지복이 도덕이 되었다. ’기쁜 소식[복음]‘이란 무엇인가? 진정한 삶, 영원한 삶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다. ? 그것이 [내세에] 약속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 너희들 안에 있다는 것이다”(29절).





“현실에 대한 본능적 증오. 이것은 모든 접촉을 너무나 깊이 느끼기 때문에 더 이상 ‘접촉’되기를 원하지 않느나, 고통과 자극에 대한 극단적인 감수성의 결과다. 모든 협오, 모든 적의, 한계와 거리에 대한 모든 느낌의 본능적인 배제. 이것은 모든 저항과 저항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느낌을 견딜 수 없는 불쾌감(말하자면 해로운 것, 자기 보존 본능이 말리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누구에게든, 악에든 악인에게든 더 이상 저항하지 않는 것 가운데서만 지복을 발견하며 ? 사랑을 삶의 유일하고 궁극적인 가능성으로 보는 고통과 자극에 대한 극단적인 감수성의 결과다”(30절).





“숭고한 것과 병적인 것과 유치한 것이 그처럼 기이하게 결합되어 있는 존재로부터 감동적인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도스토옙스키 같은 자가 이처럼 가장 흥미로운 데카당 가까이에서 살지 않았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31절).





“‘기쁜 소식’이란 우리가 적대시할 것이 더 이상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천국은 어린이들의 것이다”(32절).





“그러한 신앙은 분노하지 않으며 남을 탓하지 않고 자신을 방어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칼’을 가지고 오지 않는다. … 그것은 기적에 의해서도, 보상과 약속에 의해서도, 심지어 ‘성서’에 의해서도 자신을 입증하지 않는다. 그 신앙 자체가 매순간 자신의 기적이며 자신의 보상이고 자신의 증거이며 ’신의 날‘인 것이다. … 우리는 예수를 일종의 ’자유정신‘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 그는 고정된 모든 것에 무관심하다. 즉 말이란 [자신이 가리키는 것을] 죽이는 것이며, [말처럼] 고정된 모든 것은 죽이는 것이다. … 그는 단순히 가장 내적인 것에 대해서 이야기할 뿐이다. ‘삶’이라든가 ‘진리’, ‘빛’이라는 것은 가장 내적인 것을 가리키는 그의 표현이다”(32절).





“‘복음서’의 심리에는 그 어디에도 죄아 벌이라는 개념이 없다. 보상이란 개념도 마찬가지다. 복음서에서 ‘죄’란 신과 인간 사이에 거리가 존재한다는 것이지만, 이러한 모든 거리가 제거되었다는 것 ? 바로 그것이 ‘기쁜 소식’이다. 지복은 약속된 것이 아니며 어떤 조건에 매여 있지도 않다. 지복은 유일한 실재다. ? 나머지는 그것에 대해 말하려는 기호들이다”(33절).





“인격으로서의 신, 앞으로 올 ‘신의 나라’, 피안의 ‘천국’,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으로서의 ‘신의 아들’ 등등과 같은 교회의 조합한 개념들보다 더 그리스도교적인 것은 없다”(34절).





“천국이란 마음의 한 상태다. ? ‘지상을 넘어서’ 혹은 ‘죽음 후에 오는 것이 아니다. … ‘신의 나라’라는 것도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신의 나라에는 어제도 내일도 없으며 그것은 ‘천년’이 지나도 오지 않는다. ? 그것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경험이다. 그것은 도처에 있으면서도 아무 데도 없다.“(34절).





“‘기쁜 소식을 가져온 자’는 ? 자신이 살아왔고 가르쳤던 대로 ?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 가를 보여주기 위해 죽었다. 그가 인류에게 남긴 것은 실천이었다. 그가 남긴 것은 재판관, 간수, 고소하는 자, 그리고 모든 종류의 중상과 조소 앞에서의 태도 ? 십자가 위에서의 태도였다. 그는 저항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권리를 변호하지도 않는다. 그는 최악의 사태를 피할 수 있는 조치도 강구하지 않는다. ? 오히려 그는 그러한 사태를 도발한다. …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과 더불어, 그들 자신이 되어 간구하고 괴로워하고 사랑한다. 그가 십자가에 매달린 도적에게 한 말 속에는 복음의 모든 말이 다 들어 있다.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신과 같은 사람,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라고 도적은 말한다. … 자신을 방어하지 않는다는 것, 노하지 않는다는 것, 다른 사람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것. … 그리고 악인에게마저도 저항하지 않고 ? 그를 사랑한다는 것.”(35절).





“인류는 복음의 근원, 의미, 정당성과 정반대되는 것 앞에 무릎을 꿇고 있으며, ‘기쁜 소식을 가져온 자’가 자신이 이미 넘어섰고 폐기해 버렸다고 느꼈던 것을 교회라는 개념 속에서 신성시하여왔다”(36절).





“근본적으로 오직 단 한 명의 그리스도교인만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는 십자가에서 죽었다. ‘복음’도 십자가에서 죽었다. 이 순간 이래도 ‘복음’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가 살았던 삶과는 이미 정반대의 것이었다. 즉 그것은 ‘나쁜 소식’, 즉 화음(Dysangelium)이었다. … 그리스도적인 실천, 십자가에서 죽은 자가 살았던 것과 같은 삶만이 그리스도교적인 것이다.”(39절).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함께 끝나버린 것이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일종의 불교적 평화운동을 위한 새롭고도 전적으로 근원적인 단초, 다시 말해 단순히 약속된 것만은 아닌 지상에서의 사실적인 행복을 위한 새롭고도 전적으로 근원적인 단초가 끝나버린 것이다”(42절).





“‘기쁜 소식’의 뒤를 이어 곧바로 가장 나쁜 소식이 왔다. 바울의 소식이 그것이다. 바울은 ‘기쁜 소식의 전달자’와는 정반대의 유형을 구현하고 있다. 그는 증오와, 증오의 환상과 증오의 냉혹한 논리를 만들어내는 데 천재였다”(4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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