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반 소설

달팽이엄마
- 작성일
- 2010.5.7
은교
- 글쓴이
- 박범신 저
문학동네
“눈이 내리고, 그리고 또 바람이 부는가. 소나무숲 그늘이 성에가 낀 창유리를 더듬고 있다.
관능적이다.”(p.13)
죽음을 눈 앞에 둔 순간까지도 유리창에서 관능을 읽어내는 시인. 그러니 그가 일흔 넘은 나이에도 사랑 앞에 정열적일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의 사랑은 오히려 서지우의 사랑보다 젊었다.
시인의 감수성으로 빚어낸 소설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불리는 이적요 시인. 그가 죽은 후 그의 유언에 따라 변호사 Q가 받아들게 된 시인의 노트 한 권. 이를 통해 우리는 사건의 전개를 따라갈 수 있다. 시인의 기록 속에는 당연히 수많은 시들이 등장하고, 이 시들은 그때 그때 시인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 준다. 고전소설에서도 시는 주인공의 정서를 드러내는 데에 유효했다. 시는 그야말로 정서와 사상의 집약체인 때문일 것이다. 기껏 한 페이지도 안 되는 시들은 소설의 요소요소에서 독자들에게 긴 여운을 갖게 해 준다. 이러한 여운은 소설 속 이적요의 심정에 가까이 다가가 그와 함께 호흡하도록 도와준다.
A. 앙드레의 시 “자기를 괴롭혀 시를 짓는 것보다 / 나는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싶다.”(P.107)를 인용하며 시인은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절실한 것이었는지를 표현한다. 은교는 시인에게 한 평생 쓰고 가꿔온 ‘시’라는 것에 대해 성찰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는 자신의 시 쓰기가 얼마나 전략적이었는지를 고백한다. 적요라는 필명역시 세상의 소리들에 대해 계획적으로 만든 것임도. 이러한 고백은 모두 ‘은교’와의 만남을 통해 구체화되어 시인에게 떠오른다. 그러므로 은교는 ‘시’보다 ‘사랑’임을 깨닫게 해 준 존재이다.
그리고 바로 다음 은교와의 격차에 대해 말할 때에는 자잘한 설명 대신 이바라기 노리코의 [내가 제일 예뻤을 때]를 인용한다. 이 시를 통해 시인과 은교의 시대적 격차가 얼마나 가슴 아픈 것인지 를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세대가 희생하여 얻은 과실을 누리고 있는 세대인 은교를 시인이 사랑하고 동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뿐더러 권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시인이 젊었을 때는 전쟁통이었다. 한창때는 감옥에 있었다. 그 희생의 결과인 이 자유로움을 누리는 젊은이들이여. 어째서 너희는 나의 이러한 사랑이 늙었으므로 허용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냐! 고 시인이 부르짓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시의 힘이다. 은교와 카페에 갔을 때 젊은이들에게 밀려나올 때. 나는 이 시를 떠올렸다.
시인이 쓴 [젊은 신부]는 서지우에게 시인의 감정을 눈치채게 한다. 그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시인의 감정은 자라 있다. 눈치로 짐작하던 것을 확인해주는 계기. 그리고 이렇게 불붙은 감정의 진전을 막고자하는 제자의 행동을 재촉하는 계기. 이후 계속 ‘은교’에게서 떠오르는 ‘젊은 신부’의 이미지는 이 시를 통해 형성되었다.
G. 아폴리네르의 [토끼]를 인용하며 시인은 은교가 자본주의 호의 토끼같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은교의 민감성은 시인 자신에 대한 민감성이다. 자신의 삶이 다해가는 신호. 은교 자신이 시인에게 산소가 아직 부족하지 않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곁에 있는 한 아직 ‘삶’이 ‘젊음’이 계속되고 있다고.
심장을 나눠가진 이들, 서로의 심장을 겨누다.
“문학은 어떤 이에겐 질병이다.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사람도 있다.”(p.140)
시인이 말했다. 서지우에게 시가 그랬다고. 그렇다면 서지우는 시인에게 말할 것이다. “사랑은 어떤 이에겐 질병이다.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사랑이 있다.”라고. 그랬다. 그 둘은 은교라는 [심장]을, 문학이라는 [심장]을 나눠가졌다. 그리고 둘은 서로 어느 한 쪽에게 그것이 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서지우는 처음부터 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별’이 어째서 아름답지 않고 기껏 ‘밥’이 되느냐고 물었던 그는 시인에게 있어 구제불능의 감수성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문학을 사랑했다. 그리고 시인 이적요를 사랑했다. 자신이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동경했는지도 모른다. 그의 제자로서 자기도 언젠가는 피어보리라는 야망도 있었을 것이다. 그랬던 그에게 소설 [심장]이 가져다 준 과실은 달콤했지만 치명적이었다. 스승의 작품을 가지고 인터뷰를 해야 했을 때. 그는 선생님의 일부였고, 그랬기 때문에 괴로웠다. 절대 선생님 자신일 수 없을 것이므로. 서지우가 이적요보다 우위에 설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이 ‘젊음’이라는 사실은 그래서 더 서글프다.
‘은교’는 그래서 빼앗길 수 없는 사랑이었다. 서지우가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여고생을, 스승 이적요가 사랑한다. 제자로서는 난감하지만 어이없는 일이었다. 서지우는 교묘하게 이적요를 동요시키기도 하고, 노골적으로 방해꾼을 보내기도 하는 등 어떻게든 스승의 사랑이 비정상적임을 인식시키려고 노력한다. 서로가 상대에게 그 심장은 당신의 것이 아니라고 부르짖는 이상, 비극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둘의 비극은 비단 서로의 것을 부정한 때문에 일어난 것만은 아니다. ‘은교’가 말했듯, 그들이 서로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심장을 나눠 가질 만큼. 그들은 서로에게 완전한 이해를 요구했고, 완전한 이상을 요구했다. 이적요 시인은 제자 서지우가 문학으로 성공하기를 바랐다. 시를 이해하고 소설을 이해하는 눈을 갖기를. 그에 대한 사랑이 커지면 커질수록 시인은 여전히 요원한 제자의 성장이 증오스러웠다. 죽어 마땅한 죄라고 시인은 이야기한다. 그의 죄의 씨앗은 그것이었다고. 늘 순종하기만 하는. 자기의 세계를 가지지 못하는 그것이었다고.
서지우 역시 완전한 스승의 상을 원했다. 스승에게 불미스러운 사랑이라니. 그는 그것을 인정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었다. 스승이 자꾸 위험한 길로 내달린다. 내 스승의 모습은 본래 이런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 그의 집념은 그런 스승의 모습이 탄로 나기 전에 죽는 것이 낫다고 하는 극단적 상상에까지 그를 몰고 간다. 스승의 아름다운 뒷모습에 대한 집착. 그것 역시 사랑의 다른 이름이었을 터이다.
이적요는 서지우를 죽였고, 서지우는 그의 죽음으로 이적요를 죽였다. 심장을 나눠가졌기에, 그들은 함께 살거나 함께 죽을 수밖에 없음을 그들 역시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서지우는 자신의 죽음 앞에 눈물을 흘리면서 스승의 죽음을 함께 슬퍼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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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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