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류 어려운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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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2.5.17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글쓴이
- 룰루 밀러 저
곰출판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제목부터 독자를 아리송하게 만드는 책이다. 책의 내용도 물고기에 관한 자연과학서 같기도 하고 인간의 삶의 문제를 다룬 에세이로도 읽힌다. 이 책에 어류에 대한 분류학적 설명이 있기는 하지만 제목과 관련해서 나는 김춘수 시인의 <꽃>의 한구절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 세상에서 이름을 얻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철학사상이 있다고 한다. 사랑, 죄, 무한, 정의처럼 상상의 영역에서 존재하던 것을 세상의 영역으로 끌어오는 수단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이름이다. 물고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종의 물고기도 구체적인 이름이 주어지기 전에는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다.
이 책의 주인공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19세기 어류 분류학자이자 과학자이다. 그는 인류에게 알려진 어류의 1/5에 해당하는 물고기들을 분류하고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혼돈의 세상에 질서를 부여한 사람이다. 본인의 표현을 빌리면 "성스러운 생명의 사다리를 완성"하는 일을 함으로써 존재하지 않던 물고기를 존재하게 했다고 봐도 좋을 듯하다. 책의 주된 스토리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에 대한 논픽션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저자의 사유와 스토리가 적절히 섞여 있다.
이 책은 어류에 관한 자연과학서라기보다는 저자인 룰루 밀러의 인문학적 에세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자연과학적 지식과 데이비드 스타 조던에 대한 회고의 내용이 큰 흐름을 이루고 있지만, 저자의 호기심과 열정을 바탕으로 사랑과 상실, 삶의 질서 등에 대한 인문학적 생각과 스토리가 적절하게 버무려져 있기 때문이다. 책에 몰입되기 전까지 독자들에게 상당한 혼란을 주며 인내심을 요구하는 것도 책의 이런 특성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스탠포드 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에 매료되어 그의 자서전과 회고록 등을 탐독하며 그를 알아간다. 세계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며 물고기들을 분류함으로써 물고기들을 이 세상에 존재하게 만들었던 그의 활약을 통해 삶과 일에 대한 무한한 긍정과 도전을 이야기하는 자기계발서처럼 보인다. 하지만 중반부터 반전이 일어난다. 존경하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에 악랄한 모순이 있다는 점이 발견되고, 이야기가 반전되기 시작한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생명에는 위계가 존재하며 그 위계질서의 모습을 정확하게 분류하기 위해 한 평생을 바친 사람이다. 지진으로 표본이 없어지고, 가족들이 죽어도 좌절하지 않고 그는 이 혼돈과 맞서 싸웠다. 성실한 노력으로 그는 그만의 질서를 확립했고, 학계에서도 명성을 차지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그는 자신의 이론에 빠져 보잘것 없는 생명도 있다고 주장하는 우생학 신봉자가 되고 말았다. 객관적으로 우열을 가릴 수 있는 '자연의 사다리'가 있다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약자들을 무차별하게 공격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그의 생각의 잘못을 고발하고 이 세상 모든 존재는 서로 완벽히 다르며 그렇기에 개별적으로 모두 중요하고 의미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책에 몰입되기까지 시간이 걸리고 어려운 내용도 많이 담겨 있는 책이다. 하지만 읽다 보면 재미와 교훈도 함께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베스트셀러가 아닐까? 과학에도 오류가 있고 우리의 삶에도 오류가 존재한다. 너무 한 곳에 매몰되어 있을 때 우린 그런 점들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을 깨우쳐 준다. 이 책이 주는 또 다른 메시지는 '민들레 법칙'이다. 어떤 사람에게 민들레는 잡초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약초 채집가에게는 약재이고, 화가에게는 염료이고, 아이에게는 소원을 빌게 해 주는 존재이다. 이 세상에 쓸모없는 존재는 없다. 당신도 귀인이다. 주변의 많은 존재에게 사랑스런 이름을 불러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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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