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중심예란
  1. 2020년(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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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표기
기나긴 이별
글쓴이
레이먼드 챈들러 저
열린책들
평균
별점8.4 (27)
세상의중심예란






『기나긴 이별』은 탐정 소설이지만, 성격과 구성에 있어 기존에 알고 있던 것과는 독특한 흐름을 보인다. 이를테면, 표면적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사건의 이면을 행간에 일기처럼 독자들에게 들려주는 것이 내가 알던 탐정 소설의 정설이자 속성이었다면, 이 책의 주인공 '필립 말로'는 자신이 사건의 배경과 수집한 내용을 머리 속에 구축하고 조사해 뒀다가 한꺼번에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것으로 정리한다. 때로는 헛다리를 짚기고 하지만 예상치 못한 날카롭고 논리적인 해석이 드러나기도 하고 고집스레 신념과 우정을 지키는 전략적 행동가의 모습도 엿보인다. 세계대전을 두 번씩이나 겪은 세대들의 이야기라서 그런지 행간에 떠도는 공기는 다소 염세적이고 시니컬하며 냉소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종국에는 한 사건에 매달린 결과가 되었지만, 특정 사건에 매몰돼 수사를 이끌어가는 탐정의 활약상으로 비치기보다는 탐정이라는 직업을 가진 필립 말로라는 한 남성의 삶을 들여다 본 느낌이다. 그는 싸움에 최적화 된 몸은 아니지만 깡패와 맞짱 뜨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배짱을 지녔고, 거물급 인사와 상류층에게 결코 기죽는 법이 없으며, 큰 돈에 미혹당하지 않고, 권력 앞에 무너지지 않는 우직하고 매력적인 인물이다. 텍스트 장문에는 쉼표가 붙고, 단문과 대화체가 많으며 간결한 문체로 가독성이 뛰어난 정말 재미있는 작품이다.


롤스로이스를 탄 여인 '실비아'는 술에 취한 가난한 청년 '테리 레녹스'를 주차장에 버려두고 홀연히 떠난다. 현장에 있던 필립 말로는 인사불성이 되어있던 테리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보살핀 뒤 그의 집까지 데려다주고 그것을 인연으로 둘은 친구가 된다. 테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 소식을 전했는데 상대는 그를 주차장에 버렸던 실비아였다. 그녀는 백만장자 '할런 포터'의 딸이며 과거 그들은 이혼했으나 또다시 재결합했다. 실비아는 돈이 많고 아름답고 부정한 아내였고 테리 외에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다. 테리는 자신이 사는 곳은 1백 달러짜리 갈봇집이라며 비난했다. 얼마 후 테리는 권총을 들고 나타났고 말로는 그를 용의자 도주를 방조한 죄로 구치소에 갇힌다. 실비아가 살해됐고 테리는 강력한 용의자였다. 하지만 테리는 멕시코 오타토클란에서 자술서를 남긴 뒤 권총으로 자살했고 사건은 종결됐다. 이로써 말로는 석방됐다.


분명 떠들썩한 큰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언론은 조용하다. 살해된 실비아의 아버지 할런 포터는 다수의 신문사를 소유했고 경쟁사인 신문사들은 사주들의 명예를 건드리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갖고 있었으니 결국 여론 조작인 셈이었다. 할런 포터는 테리가 무죄라는 심증을 갖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영향력과 자금력으로 사건을 덮으려고 했고, 진범을 찾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게 포터 가문의 고귀한 이름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말로는 테리에게 돈과 시간을 투자했고 구치소에서 사흘을 보냈으며 테리에 대한 의리를 지킨 죄로 경찰로부터 구타까지 당했는데 현실은 너무나 참담하고 허탈했다. 며칠 뒤 죽기 직전의 테리로부터 이별의 편지와 5천 달러짜리 지폐(당시엔 구경하기 힘든 고가의 현금)가 도착된다.


그리고 뉴욕의 한 출판사 대표가 베스트셀러 작가인 '로저 웨이드'를 알코올중독으로 인한 섬망증으로부터 빠져 나올 수 있도록 말로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 자리에는 형언하기 힘든 아름다운 여인이 등장했는데 바로 작가의 아내 '아일린 웨이드'였다. 아일린은 남편이 행발불명 상태이며, V박사가 운영하는 병원에 숨어 지낸다고 전했다. 이에 말로는 인맥과 발품을 이용하고 육탄전 끝에 로저를 찾아냈지만 아일린이 계획적으로 말로에게 접근한 것을 눈치챈다. 테리의 편지에는 둘이 자주 갔던 빅터 주점에서 김렛 한잔 마시며 자신의 명복을 빌어 달라는 부탁이었다. 친구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찾아간 주점에서 실비아의 언니이자 할런 포터의 장녀 '린다 로링'을 만난다. 그녀는 말로가 실비아의 살인 사건에 온갖 의혹을 품고 있음을 알고 단념할 것을 요구한다. 변호사 '시웰 엔디컷'이 그랬고, 살인 전담반의 '그린' 경사가 그랬고, 이 도시의 거물급 조폭이자 테리의 두 친구 '메넨데스'와 라스베이거스의 깡패 '랜디 스타'도, 거물급 영감 할런 포터까지 경고한다. 말로는 극소수 갑부들만 사는 아이들 밸리에 거주하는 웨이드 부부의 칵테일 파티에 초대받는다.


로저는 말로 앞에서 자신 때문에 레녹스가 죽었다며 자책했고, 아일린은 과거 사랑했던 남자가 전쟁중 실종됐고 끝내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다며 슬퍼했다. 웨이드 부부에게 술은 문제의 일부에 불과했고, 그들은 뭔가 감추고 있었고 행동은 부자연스러웠다. 그리고 로저는 간통을 흔한 일처럼 이야기했고 그 대상이 죽은 실비아였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남편을 구하고 싶다는 아일린의 행동은 구하는 시늉일 뿐 희생양을 찾은 것일까? 죽은 사람에게 의리 따위가 무슨 소용일까? 하지만 말로에겐 의리를 넘어 신념이었다. 결과적으로, 세 명의 남녀가 죽었다. 아니, 세상에서 지워진 사람까지 포함해 네 명인 셈인가? 스포일러에 해당되는 피살자 정의는 하지 않겠다. 어쨌거나 사건 중심에는 테리 레녹스가 있었고, 필립 말로는 친구의 명예를 위해 끝까지 사건을 풀어나갔다는 점이다.


내가 물어보기만 했다면 그는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의 얼굴이 망가져 버린 사연조차 묻지 않았다. 만약 그때 내가 물어보고 그가 대답했다면, 어쩌면 두 사람의 목숨을 건졌을지도 모른다.p36


『기나긴 이별』에서 작가 로저 웨이드는 스콧 피츠제럴드를 찬양한다. 피츠제럴드가 1차 대전 이후의 방황하는 청춘들의 혼란을 가장 잘 담아낸 작가로 꼽힌다면, 레이먼드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은 2차 대전 이후, 곧 또다시 세계대전이 터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허무에 휩싸여 그저 무사하기만을 바라고 자신들의 구역 안에서 전전긍긍하며 술과 섹스로 권태를 잊어버리려 하는 이들을 냉정하게 바라본다. - 작품 해설 중- p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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