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이 작가님의 다른 작품은 없나 하는 생각이 들어 찾아봤더니 하나 있긴 있네요. 속 좁은 황후........ 제목이 너무 노골적이라 놀랐습니다ㅋㅋㅋㅋㅋ 생각해보면 이보다 더 노골적이고 중의적인 타이틀을 단 로설이 많긴 했어요.
리뷰를 읽어보니 광기 스릴러물인 리셋팅 레이디랑 180도 다른 유쾌한 분위기인가 봅니다. 보통 한번 성공하면 안전하게 비슷한 분위기의 작품을 내는 작가가 많은데 이 분은 과감하게 도전했네요. 필력은 리셋팅 레이디로 보장돼있으니 재밌을 것 같아요.

(11/19 추가)
(중요 스포일러 있음)
요즘 장르 소설들은 이상하게 외전까지 봐야 진정한 결말인 경우가 많네요. 인상적이게 본편을 마무리짓고 후일담을 풀어주는 게 좋긴 한데 그래도 중요한 떡밥 회수까지 외전에 넣어두면 사실상 외전이라고 부르기 힘들지 않나 싶습니다.

제가 지난 권 리뷰에서 궁금하다고 말한 듈란이 어떻게 캐런과 함께 회귀하는 법을 알게 됐는지에 대해 나왔고, 회귀 현상을 자식에게 대물림 하지 않는 결말이라 마음에 들어요. 캐런의 윗대까지는 출산을, 캐런은 사랑을 목적으로 회귀를 반복했지만 캐런의 딸인 레베카는 회귀하지 않고 사랑과 출산에 얽매일 필요 없이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 점이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미래의 캐런이 잔소리를 하는데 결혼이고 뭐고 하고 싶은대로 자유롭게 살아가려 하는 레베카는 요즘 신여성들을 보는 것 같아요ㅋㅋㅋㅋ

그리고 이 작품 초반을 읽을 때만 해도 이렇게 가벼운 로코 분위기가 나올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감개무량하네요. 임신튀라니ㅋㅋㅋㅋㅋㅋㅋ
지난 생의 이셀라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다 리셋된 게 아쉬웠는데 이번 생에서도 귀즈 왕세자를 대충 처리하고 어찌저찌 이셀라랑도 무난한 사이가 돼서 만족스럽습니다. 이셀라는 남자에게 묶이는 타입이 아니고 남자를 휘두르는 타입이라 레이몬드랑 안 맞았던 거군요. 여주의 적이었는데도 파멸하지 않고 납득이 가는 방식으로 잘 먹고 잘 살게 된 게 좋아요.
물론 온갖 더러운 짓 다하며 돈 벌고 지 자식만 애지중지한 베르딕 에반스가 처참하게 죽지 않고 멀쩡히 살아가는 결말인 건 아쉽지만... 이 소설의 주제는 권선징악이 아니니까요.

레이몬드는 잘생기고, 꽃이 어울리고, 돈 많고, 풍부한 감수성으로 여자를 사랑할 수 있는 남자라서 로판 남주구나, 외전을 읽다보니 새삼 실감했습니다. 여기다 캐런의 완벽한 해피엔딩을 위해 필요하다면 갓 태어난 딸을 죽이고 자살해서 리셋하면 된다는 비틀린 사고방식까지 완벽해요. 길고 긴 회귀를 겪고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변해버렸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중요하고 그 밖의 것은 부차적이라는 태도... 캐런이 둘만의 세계에 갇히지 말고 인생을 살아가자고 하지 않았다면 진짜 답없는 놈이었을 게 뻔한데 이 점까지 정말 남주답습니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았다.' 라는 마지막 문장에 여운이 남습니다. 사실 저는 캐런과 레이몬드가 지나친 회귀의 후유증으로 미친 전적이 있는데다 살면서 또다른 위협과 고난을 겪었을 거라고 생각하는지라 완벽한 해피 엔딩이 있을 수 있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어쨌든 이 책은 'Happily ever after'로 마지막 장이 덮인 거죠. 책을 읽지 않는 남자가 책을 완전히 다 읽었습니다. 만족해요.